인연에 대해 다시 물음을 던지게 한 두 아이들
이 세상을 살아가다 힘든 일 있어
위안을 받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살아가다 기쁜 일 있어
자랑하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네게 가장 미더운 친구
내게 가장 따뜻한 친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법정스님 [귀한 인연이기를]
사람만 인연인 게 아니다. 동물도 어쩌면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귀한 인연일지도...
친구가 1년 전에 잘 키우겠다며 데려갔는데, 친정엄마가 갑자기 간암 수술을 받게 되면서 냥이들을 돌보기가 힘들어져서였다. 남편과 두 딸이 있었지만, 남편은 워낙 싫어했고, 딸들도 처음에는 예뻐하다가 자기들 생활이 바빠지고 고양이 들어 커지자 무서워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두세 달 전에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남편이 너무 싫어하고, 거실에 나오지도 못하고 조그만 베란다에서만 생활하는 냥이들이 불쌍하다며 다시 데려가면 안 되겠냐고 말을 건네 왔다. 당장은 나도 힘드니 1년만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보름 전에 친정 엄마의 간암 소식을 알게 됐고, 지난 일요일 아침 "엄마 수술이 잡혀서 도저히 안 되겠다. 콩이랑 옥수수 데리고 간다"는 문자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난 1년 전 헤어졌던 아이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 아이 이름은 콩이와 옥수수다. 나비가 낳은 마지막 새끼들이다.
이 아이들을 낳을 때쯤 나비는 잦은 출산으로 몹시 지쳐있었고, 건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전에는 다른 곳에서 새끼를 낳은 후 한두 달이 지나 데리고 왔었는데, 이번에는 유난히 다리를 비비고 울어댔다. 조그만 박스라도 보면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하길래 혹시 새끼 낳을 집을 찾고 있나 싶어 적당한 박스를 골라 집안에 들여놓았다.
그날은 뭐가 불안한지 자꾸 울어대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옆에 앉았는데, 내가 앉아 있으면 박스 안에 들어가 몸단장을 하며 편안해하다가, 내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잽싸게 따라 나와 울어대길 여러 번, 아무래도 오늘은 같이 있어야 하나보다 생각하고 혹시 몰라 고양이를 안정시킨다는 음악을 유튜브에서 찾아 들려주고, 나는 옆에서 박스 안의 나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새끼 한 마리가 태어났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고, 이 경이로운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으나 혹시 내 몸짓이 나비를 불안하게 할까 봐 꼼짝도 못 하고 얼음이 되어 눈으로만 그 장면을 담았다. 나비는 태어난 새끼를 열심히 핥아주고 눈도 못 뜬 새끼는 어미의 까칠한 혓바닥의 힘을 온몸으로 느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 마리를 열심히 핥아주고 난 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또 한 마리가 세상에 태어났고, 두 번째 태어난 아이도 첫째처럼 어미의 따뜻한 혀로 세상에 태어났음을 느끼고 있었다. 세 번째 새끼가 태어난 걸 보고 나는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는데, 아침에 들여다보니 두 마리만 어미젖을 빨고 있었다. 우린 눈도 뜨지 못하고 간 새끼 둘을 또 가슴 아프게 묻어주었다.
콩이와 옥수수가 두 달쯤 되었을 때 친구에게 입양을 보내게 되었다. 나비의 출산은 더 이상 안 된다고 여겨 중성화 수술을 시키려고 했고(그래서 콩이와 옥수수를 보낸 뒤 중성화 수술을 했다.) 콩이와 옥수수는 거친 마당 생활보다 안전한 입양을 선택했다. 다행히 친구가 집 새단장을 끝내고 데려가고 싶다고 해서, 이제 둘은 좋은 주인 만나 행복한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나에겐 그 녀석들 말고도 함께 사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가끔 힘이 달렸기에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새끼를 돌보는 일에서 벗어난 것만도 여유를 주었다. 그 예쁜 재롱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이별의 쓸쓸함을 감당할 만큼.
그리고, 1년 하고 4개월 만에 둘이 다시 내게 온 것이다. 이렇게 커서.
녀석들은 정말 잘 커서 왔다.
몸이 약한 어미 때문에 이미 뱃속에서부터 병을 달고 태어난 둘은 병치레를 얼마나 해댔던지 친구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한 아이의 병원 치료가 끝나면 다른 아이가 아프고, 또 나았나 싶으면 다른 아이가 아파서 입원까지 시켜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돌보았는데 어쩔 수 없는 사연으로 다시 내게 왔을 땐 눈도 깨끗하고 털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행동거지가 의젓한, 그야말로 잘 자란 모습이었다.
게다가 다행인 것은, 낯을 많이 가리지 않는 거였다. 어릴 때 헤어졌으니 나를 기억할 거 같지는 않고 고양이들도 성격이 있어서 행동거지가 다 다르기 마련이라 적응하는 기간이 얼마나 걸릴까 조금 걱정하긴 했는데 다행히도 간식을 주면 잘 와서 받아먹고 가까이는 안 와도 구석에 숨어 코빼기도 안 보이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또 혼자가 아니라 둘이어서 안심이었다. 남매인 둘은 서로를 어찌나 살뜰히 챙겨주는지 좁은 장소에도 둘이 꼭 껴안고 잠을 자기도 하고 끊임없이 핥아주고 뛰어놀았다.
그 시기 나에게는 힐링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잠시, 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기에 생활은 무조건 간소하고 단순해야 했다. 뭐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위를 넘으면 그때부터는 삶은 즐기는 게 아니라 책임지는 게 돼 버린다. 놀이가 주가 아니라 청소와 관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한다. 의무가 돼버린 생활은 기쁨과 충만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스스로를 삶의 객체로 전락시킨다. 그게 지치는 거다.
어쩌다 어쩌다 보니... 란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물건 하나를 고를 때도 정말로 필요한지 수십 번을 고민했고 혹시 다른 대안은 없는지를 여러 번 살펴보았다. 그전까지의 무계획적인 내 스타일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나름 재미도 있었고 성취해가는 보람도 느끼곤 했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양이 없는 생활을 처음 두 달 누려보았다. 외출을 해서 바깥 약속을 잡고 여행을 가고, 아침 일찍 출근을 서둘러도 불안감이 생기지 않는 게 좋았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거 같은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서 좋았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고요히 조금은 낯설게 보내다 맨 처음 데리고 있던 고양이 둘을 데려올 준비를 했다.
방 하나를 고양이 방으로 꾸며놓았다. 모든 게 다 새것이었고 전보다 훨씬 신중하게 잘 고른 물건들이 하나둘 들어찼다. 캣타워는 토요일에 도착했다. 퇴근해 돌아오자마자 그걸 조립한 후 완벽한 세팅 작업을 끝냈다. 이제 2주 뒤면 올 고양이들이 여기서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하면서...
그리고 다음날 아침, 무작정 출발했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11시쯤 콩이와 옥수수를 만나게 되었다. 마치 그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것처럼 완벽하게, 나는 고양이를 맞을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콩이와 옥수수가 집에 적응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낮에는 주로 책상 아래 의자에 둘이 꼭 붙어 있다.
콩이와 옥수수가 먼저 내 집에 들어오는 바람에, 데리고 오려던 아이들은 잠시 보류되었다. 콩이와 옥수수도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나와 교감할 시간도 필요할 거 같았고, 나 또한 넷을 키우기엔 아직 준비가 덜 된 느낌이었다. 데려오려던 아이들은 둘 다 암컷인데 샛별이는 10년, 또또는 6년을 함께 산 아이들이다. 각각 다른 곳에서 내게 온 고양이들이고, 몇 번의 이사와 내 인생의 굴곡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반려묘들이다.
이 아이들을 놔두고 생각지도 못한 콩이와 옥수수를 맞아들인 이 인연은 대체 뭘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다 보니, 대체 나비와 나는 무슨 인연이길래 그 아이가 낳은 새끼들을 내가 돌보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알 수는 없지만 혼자 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마 전생에 내가 사냥꾼이 아니었을까...'
믿거나 말거나 이번 생에 내가 보살펴야 하는 인연인 거는 맞는 거 같다. 무슨 이유로든 내게 왔으니 말이다.
인생도 가끔 예기치 못한 인연의 연속이지 않을까.
내가 부르지도, 찾지도 않은 사람들이 내 인생에 들어와 파장을 일으키고,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인생에 향기를 주든, 아니면 스크레치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어쩌다 우연히란 말이 전에는 '좋은 인연'만을 생각하며 좋아했었는데, 요즘처럼 이웃이 무섭고 느닷없는 공격을 받게 되는 사람과의 만남과 뉴스를 볼 때마다, 연을 맺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때론 두려워지곤 한다. 어느 책에선가, '우연이란 없고 언젠가 스스로 만든 날갯짓이 시간이라는 격차를 두고 나타날 뿐'이란 말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남 탓이나 상황 탓을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얘기였다. 만약 그렇다면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지금 내 눈앞에 높인 결과를 좋은 원인으로 만들면 될 것이다.
아직 샛별이와 또또를 언제 데려와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고양이들 간에 서로 맞지 않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어줍게 좀 겪었던 적이 있어, 그 시간을 지켜볼 여유를 아직 갖지 못해서다. 하지만 조급해지지 않으려 한다. 또또와 샛별이는 지금 잘 지내고 있고 난 그 아이들을 매일 잊지 않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만난 콩이와 옥수수는 어쩌면 1년 전에 행복해지길 바랐던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일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