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다시 사랑해!
우린 모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부모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그리고 동물과 숲에 기대어 숨을 쉰다.
어느 시절엔 연인이 나를 살게 했고, 어느 시절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위로한다. 그 사랑과 위로에 기대어 삶은 살만하다고 느끼게도 되고, 불빛 하나 없는 터널을 지나는 고단한 삶에서도 희망을 꿈꾸게 된다.
그러니 기대어 있는 동안 아낌없이 사랑하며 사는 게 인생이지, 누가 누구를 책임지며 사는 게 아닌 거 같다.
얼마 전, 콩이와 수수를 내게 놓고 간 친구의 어머니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콩이가 떠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가 그날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엄마를 잃은 상황에서 소식을 들어서인지 왜? 왜? 하며 믿기지 않아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덜 슬퍼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혼자 남은 수수가 내 곁에 와서 잠을 잔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콩이는 와서 막 비비고 그래도 수수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거든. 어머 웬일이라니."
그 말에 나는 놀라긴 했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수수는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다. 카펫이나 이불이 깔려 있으면 그 위로 올라오지 않고 빙 둘러 다니며 나를 쳐다보았다. 꼬리를 엉덩이에 착 붙이고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이리 오라고 장난감을 흔들어도 이불 위로는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왔다가도 얼른 다시 이불 바깥으로 나가 앉았다 새 이불을 펴면 제일 먼저 와 몸을 비비던 콩이와 달리 수수는 내 영역과 자신의 영역을 구분이라도 하려는 듯, 내가 있을 땐 내 옆으로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콩이의 빈자리를 수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딜까. 바뀐 환경에 나와 친해지기도 전에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피붙이를 잃은 수수가 너무 걱정되었다. 10년 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 같이 살게 된 고양이 또기가 하늘나라로 가고 난 뒤, 또기를 어미처럼 따르던 고양이 샛별이가 한시도 나와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 샛별이는 새침데기라 또기에게는 비비고 안기며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친밀감을 보였지만 나에겐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을 보며 달려들긴 했어도 거의 가까이 오지 않았었다.
그 샛별이가 또기가 떠나고 나서는 1층 현관문 여는 소리만 나도 3층에서 울어대는가 하면, 화장실 문도 못 닫게 할 만큼 졸졸 따라다니며 울어대고, 심지어 내 무릎에 올라오기까지 했다. 그냥 보기에도 샛별이는 불안해 보였다. 스트레스로 머리 쪽 털이 빠질 정도였으니, 고양이도 분명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때문에 내 가슴에 난 구멍보다 수수 가슴에 생겼을 구멍부터 메워주려고 퇴근을 하면 무조건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수수는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샛별이처럼 화장실에 들어갈 때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밖에서 계속 울어댔다. 이를 닦을 때도 손을 씻으러 들어갈 때도 문을 항상 열어놓는다. 심지어 볼일을 볼 때도. 수수는 문 앞에 가만히 앉아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예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 있기도 한다.
잠자리도 바뀌었다. 나름 공들여 만들어놓은 럭셔리한 고양이방은 밥 먹을 때만 들어가는 장소고, 잠은 내 머리맡에서 잔다. TV를 보고 있으면 카펫 밖에서 꼼짝도 않고 나를 보고 있다. 그러다 졸기도 한다. 아무리 졸려도 내가 불 끄고 잠을 잘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다. 움직이면 잽싸게 따라와 몇 번 발길에 차인 적도 있다. 어찌나 전속력으로 달려오는지 커브를 돌 때 브레이크 밟듯 끼익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콩이가 떠난 후 한 달가량은 수수가 잘 있다가도 갑자기 울면서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 모습이 아무래도 콩이를 찾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쓰려왔는데, 나도 수수처럼 콩이 그림자를 자주 보기 때문이었다.
"수수야, 콩이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수수야, 콩이는 우리랑 함께 있어. 언제나."
10년 전에 또기를 잃었을 때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버거워서 속으로만 슬픔을 가두었는데, 그래도 한 번 겪어본 일이라 그런 건지, 하도 이별을 많이 겪어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슬픔의 길을 건너기로 했다. 보고 싶을 때마다 자꾸 밖으로 표현하기, 잊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잊지 않으려고 사진 보면서 추억하기로. 우리는 모두 언젠간 떠나니까, 함께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걸로.
그렇게 하루 이틀 나와 수수는 콩이라는 공통 추억을 가진 사이로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꼭 껴안고 자는 사이가 되었다. 한 번은 수수가 머리맡에서 자다가 내 얼굴을 톡톡 쳤다. 자다가 얼떨결에 이불을 들어 이리 와했는데, 말귀를 알아들은 것처럼 이불속으로 쏙 들어오더니 내 가슴팍에 몸을 붙이고 누웠다. 코앞에 있는 수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더니 크게 갸릉갸릉거리더니 팔베개를 하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 뒤로, 밤마다 수수는 혼자 자다가 내게 신호를 보내고 그에 맞춰 이불을 들어 올리면 품에 안겨 잠을 잔다. 가끔은 앞발로 내 목을 두르며 잘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우리 둘이 된다. 수수가 깰까 봐 아니, 수수랑 계속 그 자세로 자고 싶어서 팔이 저려오는데도 꾹 참고 잘 때도 있다.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루는 수수가 하품하는 걸 보다가 입안 한쪽이 까만 걸 보고 크게 아픈 걸까 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적이 있다. 혹시 한쪽에 이빨이 없었나? 혹시 입안 한쪽이 썩었나? 이런 생각을 하며 동물병원에 데려갈 생각을 하자 또 한 번 마음이 심란해졌다.
난 애기들을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는 게 정말 부담스럽고 어렵다. 병원에서 진찰받다가, 또는 갔다 오는 중에 길가에서 차 안에서 숨을 너무 가쁘게 쉬는 아이들을 많이 경험한 탓에 트라우마가 돼 버렸던 거다. 심장이 안 좋은 아이들은 생명과도 직결돼, 혹시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긴 후부터는 비슷한 상황만 떠올려도 내가 먼저 숨이 가빠왔다. 나도 공황장애를 앓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고양이를 안정시키는 음악, 캣잎, 캔사료 등 시도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그닥 달라지진 않았으므로 어찌 됐든 피할 수 없으면 어느 정도는 불안을 감수해야만 했다. 주변의 동물병원을 검색해 제일 가까운 곳을 알아낸 후, 먼저 전화로 대략 상담을 하고 내 마음을 안정시킨 후, 수수에게 하루 종일 이동가방에 들락날락거릴 수 있게 놀아주고, 병원에 갈 거니까 걱정 말라고 수십 번은 더 이야기해주고, 드디어 크게 숨 한 번 쉬고 수수를 데리고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수수가 놀라지 않게 계속 목소리를 들려주고 금방 갔다 올 거야, 조금만 참자 그러면서 품에 꼭 안고 갔는데, 처음엔 울지도 않고 가만히 있더니 5분쯤 지나자 차 소리에 놀랐는지 울어대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병원에 도착해 진찰해보니, 다행히 병은 아니고 털 색깔이라고 판명되었고, 대신 눈곱이 자주 끼어 안약을 사고 발톱을 깎고 돌아왔다. 의사 선생님 말이 아주 얌전한 고양이라고 했는데, 병원에서 나오자 긴장이 풀렸는지 수수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길가는 사람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수수야, 괜찮아. 다 끝났어. 이제 집에 가자. 엄마 여깄어."
횡단보도 앞에 서서 수수 얼굴을 보며 그렇게 말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뒤로는 수수가 울지 않았다. 수수를 안고 왕복 30분 길을 걸은 내 팔뚝이 떨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난 무사히 병원에 갔다 왔고 수수도 무사했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졌다.
이제 웬만하면 수수 케어는 내 손으로 다 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발톱 깎는 건 10년 넘게 고양이를 키워오면서 단 한 번도 내가 하지 않은 일이었다.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발톱이 아닌 이상은 대부분은 관리가 되었고, 발톱에 긁히지 않도록 조심하거나 어쩔 수 없는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기도 했다. 그래서 내 손은 늘 상처투성이었다. 게다가 용케 내 손을 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발톱을 깎아주는 복도 누렸는데, 아무래도 이젠 내가 직접 발톱을 깎아야 할 거 같았다. 발톱 잘못 자를까 봐 무섭다고 계속 피할 수는 없는 일이고, 고양이 집사로 조금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도전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수수가 내 손길에 익숙해지도록 발을 자주 만져주었다 숨겨진 발톱을 자주 꺼내어 만져보기도 했다. 그러다 잠자고 있는 틈을 이용해 발톱 깎기에 도전해보았는데... 드디어 내가 고양이 발톱을 깎았다. 수수가 내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수수는 눈곱을 떼주려고 할 때도(들러붙은 눈곱이 한 번에 안 떨어져 여러 번 눈밑을 닦아주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귀 청소를 해줄 때도 발톱을 깎을 때도 놀라 도망치지 않는다. 귀찮은 듯 조금은 무서운 듯 몸을 뒤로 빼는 일은 있지만 여느 아이들처럼 발톱을 세우거나 놀라 후다닥 도망치지 않는다. 그게 나에겐 무한한 신뢰처럼 느껴진다.
내가 처음 키운, 내가 처음 사랑한 첫 번째 고양이 또기가 그랬다. 사람들이 개냐고 물을 정도로 덩치 큰 또기가 내 목에 앞발을 두르고 폭 안겼다. 항상 내 팔에 머리를 베고 잠을 잤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앉아 내가 깨기만을 기다리다 정 못 참겠으면 폭신한 앞발로 내 볼을 살짝 쳤다.
내 팔베개를 하며 자는 두 번째 고양이가 수수다. 또또, 샛별, 보리, 귀리도 있는데 그 애기들은 대체로 다리 밑이나 배 위, 옆구리서 잔다. 난 마주 보고 자는 게 참 좋은데 그 네 애기들은 그렇지 못해서 좀 아쉬웠다. 그런데 수수가 내게 또다시 그런 기쁨을 안겨줄 줄이야.
수수는 놀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숨바꼭질을 자주 한다. 내가 문 뒤에 숨으면 나를 찾으러 달려온다. 내가 어디 있는지 찾는 게 수수의 큰 놀이 중 하나다. 내가 밥상을 차리면 가끔 올라와 냄새를 맡고 자꾸 덮는 시늉을 한다.
특히 김치 냄새를 맡으면 자꾸 앞발로 바닥을 긁는다.
"수수, 그건 똥이 아니라 내가 먹을 거라고!"
한 번은 내가 먹을 접시 위해 티슈 한 장이 잘 덮어놓은 적도 있다.
수수는 장난감을 쫒아 잡으려고 놀기는 하는데, 시늉만 하지 낚아채진 않는다. 콩이는 잽싸게 낚아챈 후 입으로 꽉 물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갖고 갔었는데 말이다. 아이들마다 노는 모습도 다 다르다. 혼자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막 달리며 놀 때도 있다. 내가 텔레비전을 계속 보고 있으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화면을 가린다. 끌어내리기도 귀찮고 놀아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해서 자막 없이 영화 한 편을 본 적도 있다.
수수가 방 안에서 울면, 수수, 수수하고 부른다.
두 번째 부를 때쯤이면 항상 나타나곤 하는데, 한 발을 들고 모퉁이에 볼을 비비며 무용하는 것처럼 깡총거리며 모습을 보인다. 그 표정이 세상 그렇게 깜찍할 수가 없다.
우린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