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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마몬 Oct 11. 2024

10 나를 잊어버린 나의 룸메이트 (2)


매일 아침, 희수와 재이는 나란히 앉아 악수를 했다. 악수를 하는 것 외에 재이와 희수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악수를 할 때마다 재이는 희수의 기억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억이 바뀔 때, 재이는 늘 남의 기억을 가지고 싶어 했었으니까. 그들은 악수를 한 후 몇 초간 서로 눈을 감고, 서로의 기억에서 바뀐 부분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매번 그 성과는 없었다.


악수가 별 소득 없이 끝날 때마다 희수는 서글픈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툭 하고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재이는 자신조차도 믿기 어려운 말을 희수에게 내뱉었다. 희수는 그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식탁 아래를 바라보고 앉아있을 뿐. 재이는 손을 뻗어 희수의 등을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게 되었을 때,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 것은 어려웠으니까. 얼굴이 가려진 희수가 원망과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것 같아서 재이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몹시도 재빠르지만, 긴 발자국을 남기는 발걸음으로. 재이는 희수에게 기억을 돌려주고 싶었다.  


능력의 전파에 대해 처음으로 말을 꺼낸 것은 희수쪽이었다. 그들의 기억이 바뀐 지 꼭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 생겼어.” 


희수가 노크도 없이 재이의 방문을 열고 잠에든 재이의 몸을 흔들었다. 반짝 재이가 눈을 떴다. 검은 어스름 속에 희수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이 덜 깬 상태에서 재이는 천천히 반 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모처럼 일찍 잠에 들었던 날이었다. 희수는 집까지 쉼 없이 달려온 사람처럼 헉헉거리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정말이었어. 그 능력. 나도 써봤어.”

“무슨 소리야?”

“오늘 스터디가 있었거든. 근대철학 스터디.”

“그래서?”

“거기에서 발표한 애랑 어쩌다 손을 잡게 되었어. 뒷풀이 2차 가는 길에 걔가 늦을 것 같다면서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거든. 그런데 정말 기억이 바뀐 것 같아.”


재이는 오른쪽 눈을 손바닥으로 비볐다. 스터디. 그러고 보니 희수가 한 달쯤 전에 학과에 공부를 꽤나 잘 하는 애들과 스터디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았다. 희수는 재이에게도 그 스터디에 들어오라고 여러 번 꼬드겼었지만, 대충 성적 맞추어 철학과를 선택한 재이는 철학 스터디 따위를 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었다. 그 때 희수는 또 입술을 삐쭉거리며 알겠다고 대답했었다.


“어떤 게 바뀌었는데.”

“코나투스.”

“그게 뭐였지?”

“우리 전공 시간에도 배워. 스피노자. 걔가 오늘 스피노자에 대해 발제했거든. 난 스피노자 관련해서 논문밖에 읽어본 적 없는데 걔는 에티카랑 신학 정치론을 읽어왔더라고.”

“걔가 누군데?”

“윤슬이”


슬이. 그런 애가 과에 있었었나. 재이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악수한 다음에 어떻게 했어?”


희수는 재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재이를 내려다보았다. 어스름에 가려진 희수의 표정이 점차 어둠에 적응되며 재이의 눈에 보였다. 희수는 난감한 듯이 한 쪽 입술을 이로 깨물고 있었다.


“뭐 할 새도 없이 바로 집에 뛰어와 버렸어.”


그럼 그렇지. 재이는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희수는 공부 빼고 항상 그런 식이었다. 어쩐지 모든 일에 구멍이 숭숭 나있는 듯 한 대강대강의 마무리. 재이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악수를 한 사람들도 기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생기나봐.”


누운 채 중얼거리는 재이의 얼굴에 희수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눈의 둥그렇게 켜져 있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해?”

“일단 자고, 내일 한 번 생각해봐야지.”

“…….”

“다시 기억을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고말고.”

“내가 누구였는지 잘 모르겠어.”


재이가 누운 채로 천천히 손을 뻗어 희수의 손을 잡았다. 괜찮을 거야. 재이가 조용하게 읊조렸다. 희수는 여전히 뚱하게 선 채 재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안해서 그렇겠지. 이 모든 일이 무엇인지 밤새도록 고민하면서 잠을 못자겠지. 희수는 그런 애니까. 재이가 박자에 맞추어 희수의 손등을 쓸어주었다. 이윽고 천천히 재이의 손이 내려가고, 다시금 의식이 흐려질 때 쯤 희수가 방 바깥으로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재이의 예상처럼, 이른 아침부터 희수는 식탁에 앉아 재이가 잠에서 깨서 거실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앞에는 작은 수첩이 놓여있었다. 재이는 왠지 그래야할 것 같아서 희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희수는 열심히 자신이 고민한 가설들을 재이에게 설명해주었다. 능력이 전파된다는 것, 악수를 할 때 기억이 서로 바꿔치기 된다는 점, 가장 최근에 골몰하던 기억이 바꿔치기 된다는 것 등. 몇 가지는 아는 것이었고, 몇 가지는 재이 자신도 추정만 했던 것들이었다.


“그럴듯한 이야기이긴 해.”


희수가 눈을 반짝이며 살짝 웃었다. 그의 눈 아래 피곤함이 끼어 주름이 만들어졌다. 한참이나 희수의 진실일지 거짓일지 모르는 가설을 듣고 있던 재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희수는 마치 꿈을 꾸는 듯 그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수가 부드럽게 재이의 손을 맞잡았다. 재이도, 희수도 잠시 손을 맞잡은 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재이는 애써 희수의 기억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아감벤 같은 것은 다시 가지고 싶은 기억의 종류는 전혀 아니었지만. 희수는 일주일 동안 조금은 재이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결코 이전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희수는 재이가 거실에 나올 때마다 식탁에 앉아있다 비스듬히 무엇을 말하고 싶은 듯 상체를 들어 올렸고, 그러다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그는 아마도 무서웠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 중 일부가 마법처럼 빠져나가는 것은 무서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희수를 보고 있을 때면 재이는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재이는 희수에게 기억을 돌려주고 싶었다.


이윽고 재이와 희수가 서로의 맞붙었던 손을 떼서 내려놓았다. 재이는 손을 내려놓은 후에도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아감벤. 이탈리아 철학자. 권력. 호모사케르. 그 순간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이가 눈을 반짝 떴다. 희수도 마찬가지였다. 희수의 동공이 천천히 커지더니 입이 벌어졌다. 재이는 서둘러 식탁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희수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재이가 희수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두 팔을 벌렸다. 희수가 미끄러지듯이 의자에서 내려가 재이를 껴안았다.


“오래간만이야.”


등 뒤에서 희수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재이의 어깨에 희수의 이마가 닿았다. 조금씩 어깨가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희수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재이는 희수의 등에 닿은 손을 토닥 토닥 두드렸다. 일주일 만에 겨우 재이와 희수는 기억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모든 것을 돌려놓을 때야.” 


한참을 서로 껴안고 있던 재이와 희수가 마침내 떨어졌을 때, 재이가 말했다. 희수는 눈을 손등으로 비비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희수가 돌려받은 기억의 종류가 무엇이었는지 재이는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희수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무슨 부끄러운 기억이라도 있던 것일까? 재이는 희수에게 구태여 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재이와 희수는 기억을 바꿔치기하는 능력이 낳을 비극을 알 것 같았다. 기억을 빼앗긴다는 것은 소중한 것들을 한 번의 실수로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천천히 이 모든 일을 막아야한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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