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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님 May 09. 2024

2. 그게 당장 필요해.  타자기

어느 날 갑자기 못 견디게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많즉흥적이지만 그 안에 나름 계획이 있는 나라는 사람은 특히 어릴 때 못 했던 것을 기억해 두고 꼭 이루는데 그중에 타자기를 치는 것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집 앞 성당은 나의 놀이터였다. 성당 안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앞마당에서 뛰어놀며 기도 중인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밖에서 노는 것이 지겨워지면  성당 안 작은 사무실에 들어간다. 거기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안젤라 언니'가  길고 예쁜 손으로 매일 타자기를 치고 있었는데 검은색의 멋진 타자기였다. 내가 너무나도 간절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가끔 선심 쓰듯 버리는 종이를 끼워서 한 번 타이핑하게 해주기도 했다.


아직 글을 모르는 까막눈에다가 손가락에 힘이 없어 제대로 치지도 못했지만 글쇠를 누르면 활자가 종이에 찍히던 그 순간의 기억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직장인이 되어 컴퓨터로 문서 작성을 하 중 타자기가 생각나서 검색창에서 '타자기'를 검색해 보았다. 타자기를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의 블로그에서 본 연보라색 한글타자기가 나의 마음에 불을 지폈지만 어릴 적 기억에도 타자기가 작은 크기가 아니었는데 작은 내 집에는 타자기를 둘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기에 딱히 필요한 건 아니지 뭐.. 하며 마음을 접었다.


언젠가 보라색 타자기가 집에 있으면 좋겠네.






마음속 로망으로 타자기를 묻어둔 채 나는 똑같은 일상을 보내며 일하고 가끔은 타자기가 있는 내 방을 꿈꾸다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키웠다.


 여전히 나의 집은 작고 내 방은 없었다. 내가 꿈꾸던 작은 로망들을 실현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어릴 때는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몰랐는데 금방 한 달이 지나고 계절이 지나고, 시간을 쫓아가는 게 점점 벅차고 무서워졌다.


힘없는 손가락으로 타자기 글쇠를 누르던 꼬마에서  미취학 어린이 두 명을 키우는 40대의 주부가 집을 조금 넓혀 이사한 지 4개월 만에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무서운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발병자의 동선을 체크하던 2020년. 새로 마주하는 질병에 어린아이가 노출될까 봐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외출을 자제하고 몸을 사렸다.


아이들에게는 내가 세상의 전부가 되었기에 부지런히 책을 사서 읽어주 새로운 게임을 익혀 놀아주세끼 챙겨 먹이느라 나는 소비되고 또 소비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가 타자기를 갖고 싶어 했었다는 것을


아이들의 책과 장난감, 아이들 식사와 간식만 생각하며 나를 소비하던 그때 나에게도 지친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타자기가 바로 그 필요한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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