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듀발 Jun 27. 2023

제 레이더를 꺼주세요

 * 본 글은 범죄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사건의 대한 모든 내용은 실제 사건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음을 알립니다. 또한 등장인물의 이름은 '뉴스젤리'의 "데이터로 보는 시대별 이름 트렌드, 요즘 핫한 이름은?"에서 무작위로 따온 것입니다.



범죄나 재난 등 피해자들에게 진단되는 정신질환명 중 대표적인 것은 역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흔히 PTSD라고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장애의 증상 중 피해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들은 범죄피해와 관련된 자극을 회피하는 것이다.


진단 기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외상성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 시작된, 외상성 사건(들)과 관련이 있는 자극에 대한 지속적인 회피가 다음 중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모두에서 명백하다.

1. 외상성 사건(들)에 대한 또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통스러운 기억, 생각 또는 감정을 회피 또는 회피하려는 노력

2. 외상성 사건(들)에 대한 또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통스러운 기억, 생각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외부적 암시(사람, 장소, 대화, 행동, 사물, 상황)를 회피 또는 회피하려는 노력


이 두 가지는 흔히 말하는 기본으로 깔고 가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약하든 심하든 이런 모습은 대다수의 피해자가 범죄피해 직후부터 보이기 시작하고, 가끔 장기적으로 이 증상을 호소하는 분들도 많다. 보통 자신이 '예민해졌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지훈씨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서 사람을 만났다. 혼자 사는 지훈씨의 집에서 두 사람은 술을 마셨고, 지훈씨는 술에 취해 이내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깼을 때 성관계를 요구하며 자신의 목에 과도를 들이댄 상대방의 얼굴을 보았다.


이 사건 이후 지훈씨는 비슷한 뒷모습만 집 근처에서 보아도 소름이 돋고 몸이 굳어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길 가다가 자주 우뚝 서버리거나, 돌아서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 다니던 헬스장, 도서관 같은 외부활동이 힘들어졌다고 했다.


평생 이렇게 살면 어떡하죠? 너무 화가 나요. 제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지훈씨는 그렇게 말했다.


지영씨는 대학교를 휴학했다. 더는 다닐 수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지영씨의 과 동기였고, 그는 동기들끼리의 술자리에서 취한 지영씨를 집에 데려다준다고 한 뒤 강간했다. 합의 하에 이뤄진 관계라고 그는 주장했지만 경찰 수사 단계에서 준강간이 인정되자 그는 학교를 휴학했다고 했다. 재판 결과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되었고, 어쨌든 구속되진 않았다.


지영씨는 방학 중 휴학을 결정했다고 했다. 같은 과라는 특성상 가해자가 학교 어디서나 툭툭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학교를 생각하기만 해도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도 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말고사도 제대로 못 봤다며 지영씨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은데 자꾸 두리번거리며 가해자를 찾는 것 같은 자신의 행동에 피해자들은 스스로가 이상해진 것 같다고 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 정상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촉', '싸하다'란 표현을 쓰곤 한다. 보통 좋은 일보단 나쁜 일이 예상될 때 많이 사용하는데, 이걸 레이더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인간에게는 '불안'이라는 레이더가 있다. 불안은 원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정상적인 상태이고 혹시 모를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하기 위해 존재한다. 불안이 과도하거나 정상적인 일에도 반응한다면 문제겠지만,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떨어질까 봐 손잡이를 잘 잡는 게 문제는 아니잖은가.


범죄피해를 당하면 기존 레이더로는 충분하지 않은 게 된다. 레이더가 늘어나는 것처럼 더 넓은 범위의 더 작은 것까지 감지 대상이 된다.


그래서 오작동도 많고 잦은 경보가 울려서 불편하기도 하다.


뭐, 예를 들어서 남파간첩인지 일반 어선인지 레이더가 많아야 더 잘 잡아내지 않을까?


얼마 전 서울시에서 북한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서 재난문자를 오발령하여 해명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대피를 준비할 뻔했는데, 과연 나쁘기만 한가?


우리는 모두 사파리의 사자다. 우리는 일상에서 천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통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피해자들도 사자였다. 그러나 범죄피해가 그들을 사슴으로 만든 것이다. 노루, 가젤, 얼룩말 등등. 그들은 깊게 잘 수 없고 작은 움직임과 소리에도 놀라고, 항상 경계한다.


그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레이더가 울려도 돈워리.

진돗개 하나 발령도 언젠가 해제된다.


이전 11화 여기 사람 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