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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선생님 Mar 21. 2024

퇴직한 아빠를 행복하게 만든 급식

  아빠가 퇴직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경찰관이었던 아빠는 정년을 채우고 명예롭게 퇴직했다. 나는 아빠의 퇴임식에 가지 못했다학교에 연가를 내고 퇴임식에 참여하겠다고 우겼지만 아빠는 손을 내저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퇴임식에는 안 와도 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딸이 가야지. 어떻게 안 가요?"

"선생님이 애들 두고 학교에 빠지면 안 되잖니. 엄마가 온다고 했으니 됐다."

"아니 그래도..."

"요즘 코로나로 시끌시끌하잖아. 피해 가지 않게 작고 조촐하게 하고 싶어." 



  엄마는 꽃 한다발을 사서 아빠에게 전해주었다. 행사는 소박하고 단출하게 진행되었고 아빠의 30여 년의 세월은 30분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단상 위에 올라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던 아빠는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의 손을 잡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나는 그게 기쁨의 눈물인 줄 알았다. 엄마 말에 따르면 젊은 시절 아빠는 걸핏하면 경찰을 때려치우고 더 멋진 일을 찾겠다고 쏘다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물론 내가 태어나는 바람에 아빠는 직장에 발이 묶이게 되었지만, 마음 한편에 흐릿해진 사직서를 품고 살아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퇴직한 아빠가 부러웠다. 매일 아침 허둥지둥 직장으로 튀어가는 젊은이들은 퇴직한 어르신들을 부러워하기 마련이니까. 

"아빠, 이제부터 자유네요! 아빠는 좋겠다!"

"좋지. 좋긴 한데......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아빠가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가볍게 산책을 하고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매일매일 편안한 하루를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는 멋진 일을 찾아 떠나던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빠 자격증 딸 거야. 자격증으로 취직하려고."

  아빠는 펜을 들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새 도전을 시작하겠다는 일념하나로 낮에도 책을 보고, 밤에도 책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다. 아빠는 시험에서 낙방했다. 

"아빠 떨어졌어......"

  가족들은 아빠를 위로했다. 

"에이, 괜찮아요."

"건강한 것만으로도 됐죠."

  하지만 퇴직자 모임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이 아빠를 자극했다. 

"올해 퇴직한 김경감 알지? 바로 취직했다던군."

"엇, 그래? 어디로?"

"경마장 보안요원으로 갔대. 200만 원 넘게 받는대"

"이야, 그거 괜찮네. 대단해. 거기 자리가 더 없나?"

"글쎄... 없을걸? 다들 젊은 사람 뽑으려고 하잖아."

  아빠는 먼저 취직한 동기들이 부러웠던지 집에 돌아와 씁쓸하게 웃었다.    

"퇴직해서 나이 들면 결국 동네 할아버지야. 갈 데가 없네......."  

  아빠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펜을 쥐었다 내려놓길 반복했다. 하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경비는 하고 싶지 않아. 자격증을 따서 더 좋은 곳에서 일할거야, 꼭!' 



  아빠의 방은 새벽에도 불이 들어왔다. 잠을 줄여가며 책을 보고 또 봤다. 가족들은 공부에 방해될까 싶어 숨을 죽였다. 빨래도 정해진 시간에만 하고 티비는 아예 코드를 빼버렸다. 아빠는 시험일이 가까워질수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부족하니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내는 날이 잦아졌다. 가족들은 시험에 붙을 때까지만 참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빠는 시험에서 또 떨어지고 말았다. 

"또 떨어졌어.... 그래도 한 번만 더...."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동생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보다 못한 나는 아빠에게 한마디 했다.

"이제 힘들게 공부 같은 거 하지 말고 편하게 살면 안돼요? 빨래도 하고, 밥도 도맡아서 하고, 집안일 좀 하셔야죠. 정 밖에서 일을 하고 싶으면 주변 가게에서..."

  툭 내뱉은 말이 아빠의 마음에 가시로 박혔다.   

"아빠를 무시하지 마. 나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아빠가 쿵 소리가 나게 방문을 닫으며 들어갔다. 엄마의 말로는 아빠가 속상해서 울었다고 한다. 아빠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기분이 좋았다가 나빠지는 날이 많았다. 시시콜콜하게 가족들과 싸우는 일도 잦아졌다. 핑크빛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던 우리 집은 아빠가 퇴직한 점점 깊은 터널로 빨려 들어갔다. 




"여보, 이번에는 잘 보고와!"  

  아빠의 시험일에 엄마가 더 긴장했다. 

"응, 다녀올게!"

  아빠가 떠나자 나와 엄마는 식탁에 앉아 늦은 아침밥을 먹었다.

"엄마, 아빠가 이번에도 떨어지면 어떡할 거예요?"

"떨어지면 안 되지.... 안돼." 

   엄마는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맛이 없는지 몇 숟갈 뜨지 않고 자리를 정돈했다. 나도 자리에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렀다. 

 

"미안해.... 아빠가 할말이 없네."

  아빠가 시험에서 세 번째 떨어졌다. 엄마는 마음을 내려놓은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쩐지 아빠의 목소리는 슬프지가 않았다. 

"이번엔 후회 없었어.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

  아빠는 손때가 잔뜩 묻은 책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덮었다. 그리고 새로 펜을 들어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빠, 이력서는 왜요?"

"이제 취직할거야"

"취직이요?"

"나만 좋자고 공부만 할 순 없잖아. 욕심부리지 않고 적당한 곳에 취직해서 돈도 벌고 우리 딸 맛있는 것도 사줘야지."

  아빠는 이전 직장 경력을 살려 보안업체 위주로 경비직으로 이력서를 보냈다. 결국 두 곳에서 회신이 왔고 아빠는 듯이 기뻐했다. 

"면접을 봤는데 말이야. 그중 한 명은 육군 소령이더라고. 하지만 역시 내가 뽑혔지 뭐야!"

  아빠는 아침 경비, 저녁 경비를 섰다. 점심에는 잠깐 집에 와서 집안일도 했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지라 피곤할 법했지만 아빠는 어쩐지 더 행복해 보였다. 특히 직장에서 주는 저녁밥이 맛있어서 대만족이라고 했다.

 

  아빠는 가족 단톡방에 급식 사진을 올렸다. 매일 올라오는 급식 사진은 어쩐지 귀찮지가 않았다. 

"급식이 아주 잘 나와. 한번은 랍스터도 나왔다니까! 배불러서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될 것 같아. 직장 사람들도 어찌나 좋은지 몰라. 아빠는 지금이 좋아."

  아빠도 즐거워했지만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혼자 집에서 공부하며 밥 해 먹을 땐 라면으로 대충 때우더니 급식이 잘 나와서 다행이지 뭐야. 늙으면 잘 챙겨 먹는 게 중요하니까."


  나는 나이가 들어 정년 퇴직하면 모든 게 끝인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끊임없는 실패와 성장의 일부였다. 몸은 늙어도 가슴에 품은 꿈은 나이가 들지 않기 때문이다. 

  꿈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자꾸만 멀어져만 간다. 하지만 꿈을 움켜쥐지 않아도 소중한 가족들의 지지와 배려가 남아 있는 한 일상의 작은 순간에도 행복은 언제든지 찾아왔다. 

  나는 어느 날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이제 시험공부는 완전 끝이에요?"  

"아니. 그건 아니야. 그래도 지금은 출근하러 가야지."

아빠는 밥 먹으러 직장 간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허허 웃었다.  올해 봄은 우리 집에도 핑크빛 미래가 물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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