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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Aug 07. 2024

책 없는 사회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일러두기: 이 글은 제가 2015년 조선일보 <책으로 보는 세상> 코너에 연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책 대신 스크린으로만 가득한 세상이 온다면, 아무도 책을 읽으려 하지 않고 읽어서도 안 되는 세상이 있다면 유토피아일까요 디스토피아일까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러한 세상을 그린 소설들이 있습니다. 그중 많은 영화나 다른 소설에 영감을 준 소설이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입니다. 제목인 화씨 451은 섭씨 232도 정도의 온도를 말합니다. 책 속에서 방화수들이 책을 태우기 알맞은 온도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바를 알고 난 뒤에 레이 브래드버리에게 다시 한 번 감탄했습니다. 이렇게 상징적이면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라니... 



   주인공 몬태그의 직업은 방화수(放火手, fireman)입니다. 이전 시대에 'fireman'은 불을 끄는 사람, 즉 소방수의 역할을 했지만, 모든 건물에 화재 안전장치가 설치되고 난 후에는 더는 소방수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대신 이 사회의 'fireman'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온 책자들을 불태우는 일을 합니다. 거의 모든 책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 방화수들은 책이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즉시 출동해 책을 태워버리죠. 때로는 끝까지 책을 읽겠다고 고집하는 이들을 책과 함께 불태워버리기도 합니다. 몬태그는 이런 자신의 직업에 긍지를 갖고 일하는 '모범시민'입니다. 몬태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람 있는 일이죠. 월요일에는 밀레이를, 수요일에는 휘트먼을, 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우리의 공식 슬로건이죠.”


   이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데도 시민들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집 안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을 통해 흘러 나오는 영상에 빠져 지내고 ‘귀마개 라디오’로 언제 어디서나 방송을 들을 수 있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질문이나 토론 없이 주어진 정보를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죠. 사람들은 일과가 끝나면 마음껏 유희를 즐깁니다. TV를 보거나 자동차로 신나게 도로를 질주하고 놀이공원에서 닥치는 대로 깨고 부수는 놀이를 하며 즐거워합니다. 이렇게 말초적인 자극에 도취해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죠. 머지 않은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기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너무 닮아 있습니다.


   한편 모범 방화수였던 몬태그는 클라리세라는 소녀를 만나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클라리세는 제트카를 타는 것보다 천천히 걸으면서 풀과 꽃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비를 맞으며 빗방울을 맛보기도 하는 별난 소녀였죠. 몬태그는 반사회적이라 평가받는 이 소녀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클라리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참 이상하지 않아요?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건 물론 좋지요. 그렇지만 그저 떼거리로 모여 있기만 하면 뭐해요?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그냥 모여 있기만 해도 사회적이라 할 수 있어요? 텔레비전 수업 한 시간, 야구나 배구나 달리기 같은 체육 한 시간, 그리곤 멋대로 정리한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역사 수업 한 시간, 그림 감상 한 시간, 그리고 또 운동 시간.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요.


   생각과 대화와 질문이 거세된 사회에서 자의식을 가진 소녀는 이런 말로 몬태그에게 균열을 일으킵니다. 또 책을 태우러 출동한 현장에서 끝까지 책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저항하던 노파가 책과 함께 삶을 마감하는 것을 목격한 다음부터 책에 대한 호기심까지 생겨나죠. 이를 눈치챈 방화서장 비티는 몬태그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몬태그, 이거 하나만은 명심해 두게.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 행운아야. 자네와 나 그리고 우리 전부가. 우린 지금 아주 미미한 흐름, 헷갈리는 이론이나 사상으로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자들의 흐름과 대면하고 있어. 우리 손가락을 제방에다 집어넣어 그 흐름을 막아야 해. 그 침울하고 황량한 철학의 물길이 우리 세계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말이야.”


   비티는 이 사회 체제를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의견과 언론의 평가를 귀찮아하며 대세에 따르라고 주장하는 어떤 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이 책처럼 역사적으로 책을 금지한 사례가 여럿 있었죠. 진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대표적이죠. 전국시대 한나라 출신의 사상가 한비는 그의 책 『한비자』에서 혼란스러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강력한 법치를 주장하며 백성의 악한 행동뿐만 아니라 말과 생각까지도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진나라의 승상이었던 이사는 이보다 한 술 더 떠 책을 불태워버리자고 주장했죠. 그 범위와 강도에 논란이 있지만 이사의 주장에 따라 진나라에서는 책을 불태우고 학자를 땅에 묻는 분서갱유를 단행합니다. 전쟁터로 변해버린 중원을 통일하고 평화와 안정을 위한 정책을 지향했다지만 폭력과 억압으로 유지되는 평화와 안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몬태그는 이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필요한 건 뭐든 있고 모자란 게 없는 세상인데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죠. 그리고 그 풍요 속에 사라진 단 한 가지는 자신이 불태워 없앤 책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몬태그는 전직 교수였던 파버를 찾아가 자신의 의문을 말합니다. 그러자 파버는 이렇게 대답하죠.


당신이 찾아 헤매는 건 책이 아니야! 당신은 낡은 축음기 음반에서, 낡은 영화 필름에서, 그리고 오래된 친구들에게서 책에서 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것들을 얻을 수 있지. 자연 속에서, 그리고 당신 자신 속에서 찾아보시오. 책이란 단지 많은 것들을 담아 둘 수 있는 그릇의 한 종류일 따름이니까. 우리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들을 담아 두는 것이지. 책 자체에는 전혀 신비스럽거나 마술적인 매력이 없소. 그 매력은 오직 책이 말하는 내용에 있는 거요.


   『화씨 451』에 그려진 세상도 겉으로 보면 모두가 고민 없이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올더스 헉스리의 『멋진 신세계』와도 비슷한 세상이죠. 그러나 누군가 만들어 놓은 유리온실 속에서 정해진 규율에 따라 자유나 자신의 생각 없이 사는 삶을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 존의 외침은 이런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 깊이 고뇌하게 합니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화씨 451』의 클라리세와 파버,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 존은 시민들의 생각을 제거하고 사회를 유지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소망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화씨 451』이나 『멋진 신세계』에서 이들은 부랑자, 반사회적 인물, 야만인일 뿐입니다. J.S.밀의 말을 빌리면 이 두 개의 디스토피아가 그리는 사회는 배부른 돼지들의 세상, 만족스러운 바보들의 세상입니다. 책이 없는 세상은 이런 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죠.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낫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 -J.S.밀


   저는 스크린에 둘러싸여 럭키비키를 외치는 지금의 현실을 보며 『화씨 451』이나 『멋진 신세계』가 머지 않은 우리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노잼이란 손가락질 속에도 조용히, 묵묵하게 책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희망을 품어 봅니다.




산책자 C의 핵심 질문 노트


1. 인간에게 책은 어떤 의미인가?
2. 국가는 개인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나?
3. 통제된 안락한 삶과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삶 중에 무엇이 더 인간다운 삶인가?


*핵심 질문이란 개방형 질문으로 중요한 개념 및 과정을 파악함으로써 탐구를 증진하고 사고를 촉발시키며, 의미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질문입니다. 핵심 질문을 읽기 전략으로 사용하면 책을 좀 더 깊이 생각하며 읽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산책자 C의 산 책





산책자 C의 추천 영화


『화씨 451』이나 『멋진 신세계』, 『1984』의 세계관이 곳곳에 보이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 책들과 함께 감상하시면서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습들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퀼리브리엄> 

개봉: 2003.10.02.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액션, SF

국가: 미국

러닝타임: 107분

감독: 커트 위머

출연: 크리스찬 베일, 숀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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