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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Nov 14. 2023

시선의 방향 5_⟨오펜하이머⟩와 ⟨난징! 난징!⟩

영화 에세이 (Film Essay)



이전 글과 이어집니다.


※ Spoiler Alert ※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장면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삭제된 세계

     ⟨오펜하이머⟩는 독사과 사건을 통해 주인공 오피가 불안정한 정서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윤리적 판단이 가능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를 통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발언이 무엇인지는 아직 선명하지 않다. 더욱 뚜렷한 단서를 찾기 위해 오피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살펴보자. 주인공을 제시하는 방식과 세계를 축조하는 방식 사이에 공통 분모가 있다면 그것이 곧 영화의 발언과 연결될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세계에서 관객이 가장 먼저 인식하는 정보는 흑백과 컬러라는 색(色)의 대립이다. 보는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직관적인 대립인 데다가, 색에 따라 중심인물과 사건이 달라져서 양측의 차이가 더 극명하다. 흑백 화면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지, 컬러 화면에서 핵심적인 인물은 누구인지,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지를 구분하다 보면 관객의 인식에는 자연스럽게 이분법적 개념이 들어선다. 게다가 흑백 영상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과 사건이 스트라우와 정치 드라마다 보니 ‘흑백 논리’, ‘흑백 선전’ 같은 흑백의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하기 쉽다. 관습적인 상징이 가지는 보편적 힘을 파훼하고 전혀 다른 의미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하나 ⟨오펜하이머⟩에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오펜하이머⟩에서 색의 구분은 무의식적인 진영을 만들어 내고, 이는 선악(善惡)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주인공 오피는 그가 어떤 선택을 내렸든 간에 형식의 차원에서 이미 선(善)의 진영에 자리한다. 서사는 오피의 일대기와 고뇌를 따라오라고 말하지만, 그 여정에 앞서 형식이 가치 판단을 선행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오펜하이머⟩는 오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관객에게 일임하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오피의 결정에 대한 명분과 이해의 길을 열고자 하는 작품에 가깝다. ‘프로메테우스’라는 명명,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인용, 비범한 두뇌와 실험의 성공, 그리고 밀려드는 죄책감의 이미지가 합쳐져서 영화는 오피를 신화·종교적 차원으로 격상시키고는, 정치 재판에 회부하여 순교자의 길을 연다. 오피의 성공과 몰락을 있는 사실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그려내는 형식은 그를 영웅으로 그리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이 영웅화를 위해 많은 개인이 희생된다. 여기에는 제일 먼저 오펜하이머 당사자가 포함된다. ⟨오펜하이머⟩로 오피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오피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맥락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맥락을 알려주는 일에 관심이 없다. 사건의 배경과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정보도 뿔뿔이 흩어져 있는 데다가 스치듯 지나가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오펜하이머⟩를 즐기기 위해 부가적으로 알아야 할 정보를 소개하는 수많은 콘텐츠가 그 사실을 방증한다. 정보의 제한적 제공으로 인해 오피의 행동 동기가 모호해진다. 그가 왜 원자폭탄을 만들었는지, 왜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했는지, 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했는지 관객은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오피는 실제로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인물이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출현한 다큐멘터리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 혹은 영화의 원작이라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보면 그렇지 않다. 오피가 놓인 상황은 분명 복잡했으나 그의 행동을 결정한 가치관을 이해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다. 이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뒤섞은 것은 절대적으로 감독의 선택이다. ⟨오펜하이머⟩가 전기 영화로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영화는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의 길 대신 모호함을 선택해서 그를 신화적인 인물로 포장한다.





     영화는 오피를 제외한 다른 개인도 기꺼이 희생한다. 오피 내면의 고통과 갈등에는 과할 정도로 집중하지만 그의 선택으로 인해 고통받는 다른 개인들, 혹은 같은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고뇌하지만 다른 선택을 내리는 개인들에 대해서는 조명하지 않는다. 개인은 타자와 부딪힐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비교와 대조 안에서 특성과 정체가 선명해진다. 오피라는 ‘개인’의 내면적 갈등을 깊이 다루고자 하면서 그와 부딪히는 다른 ‘개인’들의 무게를 축소 또는 삭제하는 행위는 오히려 오피에게 집중하는 힘을 약화시킨다. 영화는 오피라는 개인을 깊이 이해하는 일에 집중한 게 아니라, 단지 오피를 순교자로 그려내는 데에 방해가 되는 상황과 개인을 편집한 것 뿐이다.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에는 오피의 손자, 로스 앨러모스에서 오피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자녀, 역사와 물리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그리고 히로시마 생존자까지 여러 입장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해서 오피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오피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관점은 하나로 특정되지 않고 각자 판단해야 할 사안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이 판단이 왜 지연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명확히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해당 다큐는 오피라는 개인에 대한 다방면의 깊은 이해, 그리고 그 인물을 왜 오늘날 이 시대에 다시 불러내야 했는지를 명확히 한다는 점에 영화 ⟨오펜하이머⟩보다 성공적이고 유의미하다.





     주인공을 제시하는 방식과 세계를 축조하는 방식 사이의 공통 분모가 영화의 발언을 도출한다. ⟨오펜하이머⟩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지만 전기 영화는 아니다. 전쟁을 소재로 할 뿐 전쟁 영화라고 할 수도 없다. 이 영화는 굳이 따지자면 정치 드라마에 가깝다. 정치 드라마 안에서 오피의 적으로 그려지는 스트로스에 대한 고찰은 과연 ⟨오펜하이머⟩에 대해 무엇을 더 알려줄 수 있을까?








To be continued →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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