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모벳 Feb 09. 2020

남편과 아빠 사이의 경계인의 관찰

딸천재의 관찰

# 리스펙트

임신은 와이프와 나 모두 정신적 변화를 동반하다.
아내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변화가 일치하며 점진적으로 엄마가 되어가지만,
나는 신체적인 관점에서는 출산 전까지 체감되는 변화가 없다.
와이프 눈치보느라 손발이 바쁜 정도?
남성의 경우 정신적인 변화와 신체적인 변화 사이의 갭이 존재한다.
그 갭 구간에는 나는 일종의 경계인이 된다.

나는 아빠가 아닌 상태와 아빠인 상태의 국경을 걷고 있는 경계인이다.
경계인 눈에는 아내의 임신 후 생활을 보면,
리스펙트하게 된다.

만삭까지 회사 생활을 꽉꽉 채우며 일하는 분들에게 나도 모르게 경외심에 무릎이 꿇어지게 된다.
임산부들 리스펙트!!!!
회사에 도착하면 그나마 앉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으니 체력 소모가 덜 하겠지만.
도대체 그 지옥의 출퇴근 길을 어떻게 다니는 거지?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홀가분한 경계인인 나조차 아침 지하철은 체력 소모가 대단하다.
이쑤시개통 안에서 어깨를 ‘ㄷ’ 자로 구부려서 차지하는 면적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지하철 출발과 정지 때
 적절하게 양쪽 발에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
그뿐이랴,
정신적으로 초긴장이다.
요새 괜한 오해를 받기 싫은지라 나름 펜스 룰을 위한 자세도 해야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는 드라큘라가 자다가 가슴에 나무 말뚝 박히기 딱 좋을 가슴에 손을 얹은 자세 말이다.
그렇게 있다가 도착할 때 임신한 직장동료와 마주치면,
‘아니, 이걸 타고 어떻게
...’라고 물으면,
역시나 임신한 직장 동료도 출퇴근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지금은 임산부 배려석이 눈에 띄는 핑크에 사람들 인식도 바뀌어서 제법 잘 비워두지만,
그마저도 스마트폰을 보느라 앞에 임산부가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40분 여간 서서 와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가장 편하게 앉아서 와야할 임신 초기에는 오히려 티가 안 난다.
긴가 민가 한 상태라 양보 받을 확률이 급격히 떨어진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의외로 30대나 40대 남자가 그 미묘한 임시초기 시기를 어떻게 가늠하는지 선 듯 자리를 양보해 준 기억이 많다고 했다.
임신한 직장 동료의 추정으로는,
아마 그 나이 때 남자
의 부인들도 임신을 했거나 아니면 임신 초기에 대한 기억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라고 했었다.
당시 나는 아이와 무관한 상태였는지라,
지하철 정신없는 와중에 그런 게 보이나?

상식적으로 아무래도 같은 여성 분들이 더 잘 파악해서 자리를 양보할것 같은데?
그런데,
경계인이 되니 달라진다.



# 뭐의 눈에는 뭐만 보이느니

당시 나는 지하철 출발역 근처에 살았다.
대부분 앉아서 갈 수 있었지.
아내가 임신하고 딱 내가 경계인이 되었을 때,
이상하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지하철인데 왜 이렇게 임산부들이 갑자기 많아졌지 새삼 놀랐다.
갑자기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할 일이 많아졌다.
지하철은 관심도에 따라 내 관심사가 두드러지게 편집해서 보이는
 공간이다.
내가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에는 군인이 참으로 많구나 느꼈다.
지하철에 군인이 이렇게 많다고?
사람 수뿐만 아니라 군인 개개인별로 개별적인 개성도 구별할 수 있었다.
호오, 저 마크는 8사단 이잖어, 빡세겠군.
전투복에 3줄로 다리는 방식으로 했군. 스타일쉬한데?
흐음 저기는 처음 본 마크인데, 널널한 후방 놈들인가?
전투복 다리는 방법이 독자적이군, 물 흐르듯 한 선 매무새가 본새의 격을 높이는 군. 우리 내무반도 도입해야지.
프로는 프로를 알아본다는 그들만의 오뜨꾸뛰르 프레타 포르테
를 펼치고 있었다.
근데 군대 전역하자마자,
어랏 오늘까지도 길에서 군인을 못 본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의무병역 맞지?
와이프가 임신을 하니,
주변에 세상에나 이렇게 많은 임산부가 출퇴근을 하고 있었어?
게다가 미묘한 초기 임산부도 
눈에 잘 들어온다.
임산부 배지는 눈에 이렇게 잘 띄었나?
그 전에도 임산부 배지를 인지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임산부 배지가 
모양을 모르거나 눈에 안 띄는 것은 아닐 텐데,
관심이 도통 없으니 인식을 못했다.
마치 군인 때 처럼,
남자 친구나 가까운 사람이 군인이 아니라면,
아무리 화려한 군복을 입어도 모든 군인이 똑같이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존재 자체도 배경에 섞여버려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먹고 싶은 것

‘그게 갑자기 먹고 싶어!’
미혼 남자들이 임신에 대한 디테일은 몰라도,
대충 입덧 그리고 ‘무엇인가 갑자기 먹고 싶어 한다’ 정도는 알 것이다.
정말 희한하다.
임신하면 당연히 배고픈 것은 이해가 가나,
특정 음식
이 강렬히 당기는 것도 신기하다.
심지어 식욕 해소가
 좌절되면 호로몬이 폭주하는지 슬퍼하다 못해 우울해한다.
하지만 많은 임산부들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진화론적인 이점이 있었을 텐데 뭘까.
‘갑자기 그게 먹고 싶어’ 기간에 대해,
남편들은 그 미션 난이도와 급작스러움에 대해 곤란해하지만,
최대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오오오력을 한다.
그 속 마음은 각각 다를 것이겠지만,
이거 안 했다가는 평생 원망 듣는다는 유부남들 사이에 도는 흉흉한 구전을 잘 알고 있기도 하다.
는 '그게 갑자기 먹고 싶어!' 신호를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건 단순히 임산부가 갑이라는 생각 혹은 남자라는게 죄라는 수동적인 입장은 아니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뇌의 중요한 신호라고 생각한다.
그 계기는 다음과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8L6EAEUwrUg

예전에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대서양 한복판에서 79일간 표류한 스티븐 캘러헌의 이야기 때문이다.
요트선수 스티브 캘러헌은 바다 한가운데 표류하고 있었고 생존 확률이 극히 낮았다.
18일째 표류하다 식량이 바닥나자 스티브는 물고기를 사냥하며 버텼다.
생선은 주변에 많았으나 영양학적인 문제가 있었다.
생선살에는 단백질은 많았으나 생존에 필수적인 비타민과 무기질이 부족하
다.
계속 생선살만 먹으면 조만간 정상 활동을 못한다.
최악의 경우 기능이 정지되어 죽을 수 있었다.
사실 물고기에는 필요한 비타민과 무기질이
 모두 있었다.
스티브가 먹지 못했던 내장, 뼈 등 서양인이 보통 혐오하며 먹지 않고 버리는 부위에 몰려 있던게 함정이다.

당연히 스티브는 이런 사실을 몰랐고 
내장은 먹지 않고 버렸다.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비타민과 무기질이 부족해 점점 죽음에 가까워 질때 즈음,
스티브는 점점 식성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했다.
생선살이 점점 맛이없어지고 갑자기 생선 눈, 척추 사이의 작은 관, 생선 간과 고니 등 생선 내장이 맛있어 보였다고 한다.
억지로 먹었던 것도 아니었다.
죽음에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이런 내장을 먹고 싶어 졌고,
내 몸에는 이게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로 맛있게 마음에 우러나와서 먹었다.
평생 그렇게 혐오스러웠던 부위를 갑자기 정말 맛있게 먹게 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사례를 연구했다.
이런 뇌의 강력한 신호에 의한 행동에 대한 것이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멘터리의 내용이었다.
스티브는 표류 76일 만에 구조되었다.
뇌의 지휘 덕분에 살아남았고 고른 영양 상태로 건강했다고 한다.
상당히 인상 깊었던 다큐멘터리였다.
뇌는 식단에서 뭔가 부족한 것을 알면,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강력한 욕구 스위치를 마구 눌러댄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본 후라서 그런지,
임신 기간 와이프가 갑자기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난 이것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분명 와이프가 한 밤에 먹고 싶다는 것은 분명 뇌의 어떤 신호일 것이다.
패턴도 신기하다.
새로운 음식이나 티브이에서 처음 보는 메뉴가 먹고 싶은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 먹었던 음식이나,
자주 먹지만 요새는 잘 안 먹는 것을 찾는다,
예를 들어,
한 겨울 수박 같은 미션은 난이도가 상당지만,
과학적인 근거도 있으니 열심히들 미션 클리어를 해보시게들.
나는 진작에 그 레벨은 지났소이다.
여러분도 겪겠지만,
와이프가 임신하는 순간,
나는 남편과 아빠 사이의 경계선에 있게 된다.
그리고 경계선에 서 있는 경계인이 되니,
못 봤던 부분들이 이렇듯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세상을 인지하는 렌즈 성능이 또 이렇게 좋아진다.
하지만 이것도 아이가 태어난 후의 변화와 비교하면,
그냥 아주 작은 이벤트일 뿐이더라.
두둥 기다려라 '그 혹은 그녀'가 왕림한다.
작은 천사 이면서 큰 폭군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의 탄생 순간 당신은 촬영 감독보다는 음악 감독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