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의 말이다. 그렇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 알게 되면 보인다. 하지만 보는 것은 그 전과 다르다. 당연하다. 사랑해서 바라보는 게, 어찌 그 전과 같게 보이겠는가?
그런 사랑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존재가 신일 수도, 사람일 수도, 물건일 수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한 ‘신이 창조한 것 중 가장 최고의 걸작품’ 고양이와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한 유일한 생명체’ 개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릴 적이었다. 몇 살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어린 시절. 마당 한쪽에서 나를 보며 반기던 ‘캐리’가 생각난다. 캐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시고르자브종’이다. 캐리는 자유분방했다. 마당을 항상 뛰어다녔고, 흙을 파며 놀았다. 언젠가는 밖에 나갔다가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후 캐리가 들어왔다. 갑자기 땅을 파더니 거기에 새끼를 낳았다. 낳은 새끼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검둥이, 흰둥이, 노랑이, 갈색이…. 참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품은 팔레트처럼 그 작은 몸에서 많은 색깔의 새끼를 낳았던 캐리. 겨울이 되면 추웠는지 내 방에 슬그머니 들어와 내 옆에서 잠을 자던 케리. 하지만 케리는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봤던 케리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시골 이모 집으로 갔던 케리는 거기서 병에 걸려 죽었다. 시골집에서 방문 했을 때 아프면서도 나를 반겼던 케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근 20여년 전 일임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나를 자신보다 사랑’했던 케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케리가 없는 지금, 작년부터 나를 항상 무시하는 두 녀석과 함께 산다. 강이와 산이. 한 마리는 얼마 전까지 러시안 블루로 알았던 코랫이다. 속았다. 어쩐지 어깨가 넓고 살이 통통하게 올랐더라니... 다른 한 마리는 강이. 그 녀석은 ‘시고르자브종’이다. ‘시고르자브종’이면 어떠랴, 나에겐 소중한 신의 창조물이다. 두 녀석은 상당히 묘하다. 그래서 고양이를 가리켜 ‘묘(猫’)라고 하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반려동물이면서도 주인행세를 하는 녀석들.
음악가 폴 그레이도 내 말을 들었으면 공감했을 것이다. “고양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을 섬겨야 한다는 정설을 깨트리러 세상에 왔다.” 맞다. 그의 말처럼 고양이는 인간의 오만함을 반성하도록 신이 보낸 최고의 걸작품일 것이다. 개는 사랑을, 고양이는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라는 신의 선물이 분명하다.
이 녀석들은 신의 명령을 너무나도 잘 따른다. 배가 고플 때만 야옹거리며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내 곁에 온다. 그리고 비비적거린다. 그렇게 오라고 하면 딴짓하던 녀석들이…. 내심 인간의 위대함을 뽐내며, 튕기려 하지만 그 녀석들의 애교에 무장해제당할 뿐이다. 강이와 산이는 나에게 있어 치료제다. 내 마음의 상처를 함께 씻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사연 있는 고양이들이다. 둘 다 유기묘 출신이면서, 파양까지 당했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오랜 청원(?) 끝에 입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어느 날 유기묘 사이트에서 산이를 보게 되었다. 실물과도 다른 너무나도 우아한 자태였다. 우리 부부는 산이에게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바로 입양은 할 수 없었다. 산이를 입양하기 위해서는 강이도 같이 입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사숙고했지만 뻔한 고민이었을 뿐이다. 고양이는 진리였다. 그렇게 그 두 녀석은 우리 식구가 되었다.
<항상 어디선가 숨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강이, 애교담당>
식구가 된 첫날. 싱크대 밑에 숨어서 며칠째 나오지 않았다. 걱정되었고, 왜 그렇게 숨는지 여기저기 물어봤다. 대답은 모두 같았다. “기다려 봐!” 그랬다. 기다리니 나왔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 집의 주요 곳곳을 비비적거리며 다녔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 집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먹을때만 친한 척 하는 우리집 보스 산이>
내 인생의 과거 속 강아지, 현재의 고양이는 나에게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 존재들이다. 케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동물공장과 동물 학대에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이와 산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유기묘의 상황과 처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안개를 보여준 맥닐 휘슬러,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여기 그림이 하나 있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녹턴:배터시강」이다. 뿌옇기만 한 이 그림을 보면서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 그렇다. 휘슬러의 그림을 봤던 오스카 와일드는 안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게 중요하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 ‘인식’. 아무리 세상에 가득 있다고 해도,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실제로 휘슬러의 그림을 봤던 러스킨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했다. 그의 그림은 작품성이 없고, 물감을 캔버스에 찍 뿌린 장난질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똑같은 화가의 그림을 보고도 두 사람은 다르게 생각했다. 한 명은 안개를, 한 명은 물감을 아무렇게나 뿌린 형편없는 그림을 봤다.
어떠한 인식을 하고 보느냐의 차이다. 세상도 그렇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이 다양한 인식과 생각의 폭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품이다. 알랭 드 보통은 예술을 가리켜 ‘마음을 흔드는 그 무엇’이라고 했다. 마음이 흔들릴 때 사람은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예술품이 가득한 미술관에서 내가 사랑하는 개와 고양이와 함께 들어가 보려 한다. 개와 고양이는 관객으로 사람들이 그린 그림을 함께 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관점에서 그림을 바라보고자 한다. 인간 또한 그들과 함께 그림을 보며 세상의 생명에 대해 ‘인식’하는 시간을 가져볼 것이다. 입장료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알고 싶은 마음이다.
이 글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다. 새로운 인식을 찾기 위한 우리 인생 여정의 티켓이 되길 기대해본다. 개냥이들과 함께 미술관으로 입장한다. 입장료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