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도락-커피와 맛집
간절하다.
커피 한 모금,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 내 혀를 즐겁게 만들어 줄 음식이 말이다.
20대에는 무엇을 먹느냐보다, 무엇을 보느냐가 더 중요했다.
김밥 한 줄과 물 한병이면 남한산성도 거뜬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단순히 과거의 문화유산만을 찾는 여행이 아니다.
현재 사람의 취향과 삶도 체험해야 한다.
라는 핑계를 만들어
맛집 투어를 넣었다.
뭐, 간절함이라는 테마에 어긋나지 않으니 괜찮다.
식욕만큼 간절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황룡사 9층 목탑지, 대릉원, 굿즈샵을 돌아다니다 보니
간절한 것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커피 한 잔이었다.
원래 나는 핫 아메리카노만 먹는다.
얼마 안 되는 소장파라 할만하다.
그런데 경주의 더위는 내 신념을 꺾었다.
지나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파는 곳을 발견하자
냉큼 들어갔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정보 센터를 찾아 나섰다.
경주의 정보를 찾기 위해서?
아니, 시원한 에어컨을 쐬면서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대릉원 앞에 있는 정보 센터는 정말 더위에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게
큰 안식처이자 위로가 되었다.
간절하게 찾아다닌 쉼터였다.
황룡사 9층 목탑지의 간절함 '따위'는 날려버리고
에어컨 밑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더위 속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서 간절함을 발견한다.
시원한 음료와 에어컨을 찾았던 나의 눈빛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몸과 속까지 시원함으로 충전한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릉원을 방문했다.
시원한 산들바람과 너그러운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가며
무더위도 잊을 것 같았지만,
더위는 스토커처럼 다시 찾아왔다.
미추왕릉 앞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와 작별 인사를 고했다.
대릉원을 빠져 나왔을 때는
더위도 더위지만 배가 고팠다.
흘린 땀방울만큼, 뱃속을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 정도였다.
이것도 간절함이라면 간절함 아닐까?
그 유명하다는 10원빵을 찾아 돌아다니던 나는
드디어 10원빵을 사 먹어봤다.
이름과는 괴리감이 있는 가격이었지만 슴슴한 맛을 좋아하는 나에겐
제법 맛있었다.
그런데 황리단길을 따라 걸으면서
'원조'라는 말이 유독 많이 간판에 붙어있음을 발견했다.
10원빵이 그랬고, 황남빵이, 찰보리빵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의미 없어 보였던 '원조'라는 간판이
곳곳에 있는 것을 보며,
또한 그곳에 기다란 줄을 서서 먹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간절함이 느껴졌다.
꼭 먹고 말겠다는 간절함의 의지!
그것은 경주 속 맛집을 갈 때마다 어디든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경주에 도착한 첫날 맛본
짬뽕도 그랬다.
내가 생각하는 짬뽕과 다르게,
정말 낚지 와 삼겹살을 섞은 찌개였다.
이것 하나 먹기 위해,
나는 그 더운 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것일까.
맛집 앞에 장사 없다.
그 더위 속에서 간절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맛집의 맛을 평가할 수 있다.
저녁에 아내와 함께 갔던
경주 속 이태리 맛집도 마찬가지였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근처 '아무 곳'이나 가려 했지만
꼭 먹고 싶다는 간절함을 담아 걸어갔다. 그 결과 만난 맛집.
1000년 고도, 신라와 어울리진 않았지만
내 뱃속에는 어울렸던 그 맛.
아란치니를 맛보며, 간절함의 결실을 맛봤다.
그렇다!
이러니, 간절함을 가져야 한다.
간절한 자만이 만날 수 있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많은 맛집과 무수한 먹거리가 있었지만
자금과 시간 부족으로 찾지 못함이 아쉽다.
그러나, 그 아쉬움이
경주 여행을 더 빛낸다.
다음에 또 와야지!라는 간절함의 씨앗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줄 것인가?
여러 고민을 했지만 나는
#경주다움 #모두가 좋아할 만한 것 #음식을 키워드로 찾아다녔다.
그 결과
경주의 문화유산을 담은 쿠키를 사기로 결심했다.
당시에 내가 있던 곳에서 쿠키를 파는 곳까지의 거리는 30분.
불국사 밑에 있는 가게였다.
보통, 불국사를 보러 갔다가 쿠키를 사겠지만 '
나는 오롯이 쿠키 하나만을 사기 위해 불국사를 갔다.
그리고 불국사를 보지 않고
쿠기를 샀다.
나의 목적은 쿠키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음, 경주 여행을 올 때 불국사를 꼭 들려야 하는 명분이 생겼다.
선물을 들고,
남은 시간을 한적하게 보내고 싶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간절함은
얼마 안 남은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는 것이었다.
왕릉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이 간절한 시간이었다.
베이글 가게에 들러 커피 한 모금에
왕릉 한 번을 바라봤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저 왕릉은 무엇일까?
검색해 보니, 내물 마립간 무덤이었다.
잠깐 아내에게 쉬라고 말한 후 홀로 그 무덤까지 걸어갔다.
그러다 알았다.
무덤이 카페의 정 반대쪽에 있음을!!
다시 걸어서 내물 마립간 무덤을 향해 걸어갔다.
왜 그렇게 간지 모르겠다.
그 더위를 이겨내며 내물 마립간 무덤을 꼭 봐야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간절함이 도진 것이다.
여유는 날아갔다.
그렇게 첨성대-계림-내물 마립간 무덤-최씨부자-월정교로 이어지는
혼자만의 산책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더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졌다.
그리고 홀로 걷는 그 산책 시간이 나에겐
매우 깊은 영감과 마음의 장작을 마련해 준 시간이었다.
첨성대를 바라보며,
선덕여왕의 간절한 마음을 보았고
내물 마립간의 무덤을 보면서
고구려의 도움과 간섭 속에서 내물 마립간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감정이입을 해봤다.
그가 꿈꾼 신라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최씨부자의 집을 지나면서는 무엇이 그들이 선행을 베풀도록
만든 것일까.
그것도 집안 대대로 말이다.
월정교에서는 1000년 신라의 영광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집약과 경주인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신라는 어떤 의미일까?
월정교에 들리는 김에
다시 커피 한 잔을 시킨다.
그리고 밤을 기다린다.
밤에 바라보는 월정교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카페인에 취한 나는
경주의 밤에 푹 빠져 버렸다.
내 뒤에 아내는
피곤한 듯 연신 하품만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간절함은 누구나 평등한 것이 아니다.
마음의 장작을 태울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날 때만
간절함이 생긴다.
아내의 하품이 나에게 알려준 이야기다.
그러나, 그 날밤의 월정교는 지금도 내 눈에 남아있다.
그러면 되었다.
간절함이 주는 여운을 지금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