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차 : 이 밤이 지나면 우린
CAMERA : Rollei Prego90
FILM : Kodak Colorplus 200
끝이 안 올 줄 알았던 마지막 날이 왔다. 익숙해진 이 곳도 오늘이 지나면 안녕이라 아쉬움만 가득한 채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의 일정은 이 여행의 취지와 꼭 맞는 무계획이었다. 이제 시차적응이 거의 다 되어서 새벽에 깨지 않았기에 (사실 그 전날 과음했다) 가볼만한 곳이나 가고 싶은 곳을 검색도 하지 않았다. 사실 부다페스트의 관광지 중 어제 웬만한 곳은 다 다녀온 것 같길래 오늘은 구글맵도 키지 않고 걷기로 했다.
친구가 준비하는 동안 소파에 누워서 여행 영상을 편집하다가 10시가 넘어서 숙소에서 나왔다.
인간적으로 전날 과식했으면 며칠 동안은 배가 안 고팠으면 좋겠는데 인체는 참 신비하다. 아침부터 너무 배가 고프길래 집 근처 마트에 갔다. 간단하게 빵 하나씩 먹으려고 했는데 빵을 어떻게 구입하는지 모르겠어서 한참을 헤맸다. 우리네 마트 채소 코너처럼 알아서 바코드를 붙여가서 계산하는 시스템인 것 같은데 빵 그림도 없고 이름도 안 쓰여있고 심지어 헝가리어로만 되어 있어서 멘붕이 왔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걸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좀 늦어서 그런지 빵을 사는 사람도 없더라. 근처에 직원도 없었다. 바코드 출력하는 기계를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보고 있으니 어느 주민분께서 오셨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직접 빵의 코드를 찾아서(?) 바코드를 출력해주셨다. (보고 기억했다가 저녁에 써먹어보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셨는지 1도 모르겠더라.) 그 천사님 덕분에 무사히 빵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아침부터 행복해졌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일 수 있는데 그 사소한 파장이 내게 큰 파도로 돌아왔다. 그를 보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앞으로는 외국인들이 헤매고 있으면 더 열심히 도와줘야지.
빵을 씹으면서 도나우 강을 따라 산책을 하고 그리고 오늘도 세체니 다리를 건너 데악역 근처로 넘어왔다. 어제보다 춥긴 했지만 하늘이 맑아서 기분이 좋았다.
걷다가 젤라또 가게 앞에 사람이 많길래 젤라또도 먹고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서 짜디짠 엔초비 피자랑 파스타도 먹었다. (이탈리아는 정말 대단한 플러팅의 나라다. '레이디'라고 말하는 서버를 이번 여행에서 처음 봤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도 사 먹고 정말 열심히 걸었다.
걷다 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구름도 많이 껴서 '예쁜 노을 보기 힘들겠다' 싶었다. 어제처럼 도나우강을 보면서 지는 노을을 볼까 하다가 부다왕궁에 올라가서 높은 곳에서 노을과 부감을 함께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갔다. 부다왕궁으로.
리프트 같은 거를 타볼까 하고 기다리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검색을 해보니 버스로도 위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급하게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해서 버스를 타고 갔다. 대중교통 3일권 티켓을 드디어 썼다. 친구한테 3일권 티켓을 굳이 사야하냐고 했었는데 이럴 때를 위해 우리가 미리 준비를 했었구나. 하핫.
높은 곳에서 부다페스트의 전경을 보니 더 아름다웠다. '어제 구름이 없을 때 여기 한번 올라와볼걸'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매일 같이 해가 지지만 항상 같지는 않으니까. 어제의 노을은 얼마나 예뻤을까.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길래 금방 자리를 떴다.
부다 지구 쪽이 서쪽이었는지 해 지는 게 페스트 지구 쪽과는 달랐다. 같은 시간 같은 하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곳의 느낌이 달랐다.
구름이 많이 껴서 노을이 안 예쁠 거라던 내 생각이 틀렸다. 구름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다운 노을이 되었다. 빈에서 부다페스트로 넘어올 때 봤던 노을만큼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가만히 서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니 어느 정도 내 마음이 정리가 됐다.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왜 열심히 달렸지만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한 번도 내 내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노을을 보면서 알았다. 내가 나를 아끼지 않아서였다.
구름이 많다는 것은 흠이 아니었다. 오히려 노을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존재였다. 내가 받아온 상처는 흠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더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나는 나를 좀 더 믿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한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회사에 그만두겠다고 연락을 했다.
노을 덕분에 붉어진 부다왕궁은 참 아름다웠다. 오래전 이 성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했을까. 그들이 희생 덕분에 고풍스러운 왕궁을 보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서 감사했다.
해가 많이 졌다. 노을이 꼭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들> 같았다. 하늘의 색과 능선과 나무들까지. 여행 마지막 날에 그림과 같은 이런 노을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넋을 놓고 노을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어떤 남자가 음악을 틀었다. 이 모습과 참 잘 어울리는 BGM이었다. 어떤 노래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감성이 와 닿았다. 그도 이 노을을 보며 슬픔을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왔다. 부다페스트에 조명이 켜졌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제 부다페스트에서의 시간이 18시간도 남지 않았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여행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우리는 마차시 성당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화장실을 찾느라 보낸 시간과 화장실 줄이 너무 길어서 그걸 기다리는 시간까지 꽤나 긴 시간을 쓰고 나서야 갈 수 있었다. 화장실 앞에서 돈 받으시던 분 때문에 인류애가 좀 사라질 뻔했지만(말한 금액보다 돈을 2배 이상 더 가져갔다) 그래도 마지막 날이니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돈 벌어야지 뭐.
마차시 성당 앞 핫 와인을 파는 가게가 있길래 핫 와인으로 몸을 녹이면서 성당 구경을 했다. 이 와인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평소보다 더 맛있는 기분이었다. 어부의 요새에서 국회의사당을 찍는 게 뷰포인트였는지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처럼 찍어보려고 했는데 어느 커플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서 지도를 보시는 게 아닌가. 하하. 정말 지네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뭐 이왕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셨으니까 한 컷 남겨드렸다.
국회의사당이 꽤나 커서 가까이에서 볼 때 그 위압감이 엄청났는데 그래서인지 이렇게 높은 데서 보니까 정말 멋있었다.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흔들리는 것이 필름 카메라의 매력이니까... 응... 네...
술도 마셨겠다 집에는 걸어가기로 했다. 계단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급하게 셔터를 눌렀다. 사실 뭘 의도하고 찍었다기보다는 기분도 좋고 마지막 날인데 안 쓴 필름도 많고 해서 그냥 찍었다. 근데 현상하고 생각보다 사진이 너무 잘 나왔더라.
저번 글에서도 썼는데 이런 게 바로 필름 카메라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나오는, 현상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동안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설렘.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잘 나오면 잘 나오는 대로 얻을 수 있는 행복들. 빠른 시대에 맛볼 수 있는 느림의 미학. 이 맛에 계속 필름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골목을 다니는 걸 좋아한다. 여행을 가는 곳마다 동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 도시의 분위기를 더 쉽게 느낄 수 있기도 하고 소소한 추억들이 생긴다. 늘 항상 좋았던 기억들은 도시의 골목에서부터 왔다.
사실 마차시 성당에서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사람이 너무 없어서 조금 무서웠다. 사고가 많이 났는지 사이렌 울리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리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없고. 당장이라도 누가 튀어나와서 나를 없애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분위기랄까. 겁을 엄청 먹고 걷고 있었다.
근데 그런 골목에서 패트로누스를 만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해리포터에 나오는 패트로누스는 행복했던 기억을 가진 상태로 주문을 외워야만 나타난다. 이 골목에 누군가의 행복이 깃들었다는 이야기다. 별 것 아닌 조형물 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겁은 용기가 되었다.
패트로누스를 보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이번 여행을 패트로누스를 부르는 행복의 기억으로 삼을 것이다. 내 삶의 끝이지만 다시 처음이 될, 지친 나에게 위로가 되어준 이 여행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내 일기를 읽어준 당신에게도 행복이 깃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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