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맘, 더는 후회하지 않으려 미친 선택을 했다(3편)

하나 남은 수학마저 내려놓은 학군지 adhd 남고생, 그 이후 이야기

by 그림크림쌤


"군입대 앞두고 원 없이 노는 아이 같아요."

티라노 담당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께 한 말입니다. 작년 가을, 하나 남은 과목인 수학마저 그만두네 마네가 시작되며 청소년 무기력으로 유명한 교수님께 데려간 터였습니다. 이제 공부에서는 내려놓을 게 없다는 사실이 너무 많이 불안했거든요.


모든 과목 공부를 내려놓으면 그다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는 건 아무리 봐도 '등교'뿐입니다. 어찌어찌 고등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이대로면 대학진학이나 취업은커녕 요새 20대의 사회문제라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건 시간문제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혹여 위기가 온 티라노에게 동아줄이 되어 주시지 않을까'하는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청소년 무기력으로 유명한 담당 교수님에게 데려간 지 벌써 반년이 흘렀습니다.


사실은 티라노와 단둘이 외출할 구실을 만들고자 옮긴 것도 있었습니다. 병원까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진료를 기다리며, 너무 일찍 도착한 날은 때론 카페에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마치 어릴 때 자주 하던 티라노와의 데이트를 연상케 하기에, 티라노 진료 날은 제겐 '설렘' 그 자체였습니다. '무슨 그런 사소한 일로 병원을 옮겨. 말도 안 돼!'라고 다들 생각하겠다 싶습니다. 집 앞조차 부모님과 함께 걸어 다니는 것 자체도 창피하답니다. 그런 아들이 되었기에, 햇살을 받으며 집에서 적당히 먼 병원에 다니게 된 것조차 행복한 겁니다.


고등학생에게 겨울방학은 '역전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꼬박 2달이나 되는 데다, 사실상 2학기 기말고사 후 낮 시간 공백까지 합치면 온종일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3달가량 주어지거든요. 게다 여긴 학군지라 학원 일정들이 더 빼곡합니다. 일반적으로는 3과목, 많게는 5과목도 학원에 다니더라고요. 미적분과 대수, 영어와 국어, 앞으로 배울 물리, 화학까지 말입니다.


티라노는 다른 아이들이 하지 않는, 본인이 정한 두 과목 공부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매진합니다. 바로 '체스와 코딩'입니다. 일정이라고는 주 2회 헬스 딱 2시간뿐이니 남아도는 시간 전체를 저 두 과목에만 매진합니다.


낮에 아빠가 출근했을 땐 컴퓨터로 체스를 둡니다. 어떤 수가 뛰어나고, 어떤 수는 실수였는지 파악하기 위해 항상 'AI 분석'을 돌려봅니다. 매 경기 분석을 돌리려고 본인 용돈으로 체스 앱 유료결제까지 했답니다. 그렇게 질색하던 오답노트를 체스에선 왜 저리 열심인지 모릅니다.


그러다 온라인으로 친해진 친구들이 부르면 마인크래프트를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수다 떨며 하기도 합니다. 친구 그룹에서 본인이 맡은 역할이 '코딩'이랍니다. 무슨 동아리 활동을 하는 아이처럼 본인 역할에 충실합니다. 친구들과 뭔가 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말을 안 해주니 알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로 체스와 코딩을 하다 지치면 드러누워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봅니다. 뭘 보나 슬쩍 보면 늘 같습니다. 레전드 체스 경기를 분석해 주는 영상만 봅니다. 어찌나 체스에 과몰입이 심한지, 누가 보면 체스가 수능 과목인 줄 알겠다 싶습니다.


아빠 퇴근 후엔 아빠와 함께 거실에서 체스를 둡니다. 아빠가 체스학원에서 받아온 체스 퀴즈를 복사해 나란히 앉아 체스 퀴즈를 풀기도 합니다. 아빠는 체스 퀴즈가 안 풀리면 티라노 몰래 티라노 답을 커닝해 학원에 제출하기도 합니다. 아빠와 함께 컴퓨터로 번갈아 체스를 두며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깔" 난리입니다. 아빠 바보냐며 놀리거나 타박하는 소리도 종종 들립니다. 둘이서 어찌나 애틋한지, 두 부자가 흘리고 다닌 꿀이 온 집안 여기저기 난리입니다.


"헐. 아빠 지금 체스 앱 접속했네!"

"아빠 또 체스 둬!"

분명 낮이라 출근해 있는 시간인데 업무 짬짬이 틈날 때마다 남편이 혼자 체스를 두나 봅니다. '아빠가 나와 함께 시간 보내려고 일부러 체스하는 게 아니구나!' 티라노 생각이 제게 전해집니다. 제가 봐도 남편이 체스에 진심입니다. "티라노 꼭 이겨보고 싶어!"라며 귀한 점심시간을 내어 체스학원도 몇 달째 다니고 있으니까요.


처음엔 아빠도 가끔 이겼습니다. 2달 전 방학 내내 체스 온종일 체스공부만 한 이후부터는 티라노를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티라노에게 매번 지는 게 진심으로 분하다며 열심입니다. 그런데도 지능 상위 1% 멘사 아빠는 총 지능 평균 '하' ADHD인 티라노에게 매번 집니다.


"나 정말 저력이 있나?"


하루는 뿌듯한 표정으로 제게 저리 말합니다. 체스를 하게 내버려 두었더니 티라노에게 의도치 않은 변화가 왔습니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한, 진심으로 체스에 열심인 아빠를 이기는 경험을 통해 성취감이 쌓이나 봅니다. '나도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자기 효능감이 진심으로 와닿나 봅니다. 옆에서 제가 "네게 저력이 있어. 너도 하면 되는 사람이야."라고 그렇게나 얘기해 줘도 반신반의하던 아이였는데 말입니다.


희한하게 분명 이 아이는 수학을 다시 하게 될 것이라는 강한, 근거 없는 확신에 찬 믿음이 생깁니다. "티라노는 정말로 쉼이 필요했던 거야. 알고 보니 ADHD였던 아이가 학군지까지 와서 6년 반동안 제 속도보다 빨리 달리느라 너무 지쳤던 거야." 남편과 진심을 담은 이런 대화를 매일 나눕니다. 때론 티라노에게 들리듯도 말합니다.


티라노는 과연 본인이 두 번째로 한 약속을 지키게 될까요? 그래서 개학 후 수학학원을 다시 다니게 될까요?




앞으로는 빠짐없이 연재하겠노라고 선언해 놓고는 지난주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연재 약속을 지키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나와 사춘기 아들의 ADHD 이야기 2>는 매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ADHD 교사엄마가 ADHD 아이에게 전하는 학교생활백서> 책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늘 최선을 다하며 한발 한발 나아가는 그림크림쌤이 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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