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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수리 Jul 01. 2023

알로하 엘라

첫사랑

“엘라, 정말 안갈거니?”

“안가요 엄마. 전 집에서 넷플릭스 보고 있을게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엘레노어와 크리스 맥케스터 부부는 15살 된 딸 엘라를 두고 가는게 못내 아쉬웠다. 펄하버 히킴기지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커뮤니티에서 손꼽히는 흥겨운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비록 흰눈과 핫코코아는 없지만, 칼루아피그 바베큐와 루아우 댄스, 남태평양의 열정이 넘치는 파티다. 작년까지도 손꼽아 기다리던 크리스마스 파티를 안가겠다니, 엘레노어는 엘라도 이제 아이에서 숙녀가 되어가는구나 생각했다. 


탁. 양어머니, 아버지가 나가고 현관문이 닫혔다. 엘라는 거실소파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음은 지금이라도 당장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킬리아후 동산 앞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10분간 기다렸다 갈 생각이었다. 혹시 어머니가 스카프를 챙기러 다시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엘라는 그렇게 거실소파에 앉아 핸드폰만 바라보며 10분을 채웠다. “됐다.” 엘라는 서둘러 방으로 올라가 미리 챙겨놓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왠지 오늘은 최고의 크리스마스가 될것 같은 예감이었다. “엘라! 여기야! 빨리 빨리!” 미리 와 있던 클레어와 히사에는 손을 흔들며 엘라를 재촉했다. 


미들스쿨을 졸업하는 기념으로 아이들은 갖가지 모험을 한다. 인스타에 올라오는 엘라 학년 아이들의 영상과 사진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시크릿비치에 가서 다이빙하기, 법으로 금지된 바다거북 만지고 오기, 밤에 화산분화구에서 기념사진 찍어오기 등 다소 위험한 일탈을 하며 자신의 어른됨을 증명하는 일이 유행이었다. 엘라는 오늘따라 두근대는 심장이 흥분인지 두려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모든 졸업생의 통과의례 같은 의식을 치른다는 것만으로도 엘라는 왠지 어른이 된것 같은 기분이었다. 


엘라와 일행이 킬라우에화산 입구에 들어설때 이미 석양이 뉘웃뉘웃 지고 있었다. “서두르자! 이러다 분화구 닿기도 전에 깜깜해지겠다.” 클레어가 진두지휘했다. ‘선셋이후 진입금지' 푯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세아이들은 계속해서 울퉁불퉁한 라바산을 올랐다. 잠시 뒤, 아이들은 시뻘건 라바가 꿀렁이는 분화구 앞에 다다랐다. “자, 빨리 빨리! 이리 모여! 찍는다!” 클레어는 동영상을, 히사에는 사진을 찍었다. 엘라도 계속해서 아름다운 라바와 친구들을 찍어댔다. 아! 라바는 여러번 봤지만, 이시간에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라바는 정말 아름다웠다. 


후두둑.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머야! 비가 오네! 얘들아, 서둘러!” 클레어가 말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아이들은 당황했다. 서둘러 올라오던 길로 되돌아 가려고 돌아섰다. 쉬-익. 쉬이익! 앞이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라바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엄청난 수증기를 만들어냈고, 매캐하고 뜨거운 수증기는 순식간에 분화구 앞을 잡아먹었다. 내리는 비로 인해 바닥은 기름을 부은듯 미끄러웠다. “어떡해! 하나도 안보여! 넘어질것 같애!” 아이들은 도움을 청하려 핸드폰을 들었다. “안터져!”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누군가 바닥에 굴렀다. 히사에 목소리다. 엘라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연기로 가려진 시야에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엘라는 몸을 낮추고 바위를 더듬으며 히사에쪽으로 기어갔다. 세 아이들은 눈물과 침으로 범벅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고 있었다. 


삑!삑!삐이익!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엘라가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잠깐만!” 소리에 집중했다. 누가 있다! “도와주세요!” 누군가가 외쳤다. 대답이 없다. 동물소리를 착각한걸까? 순간 환한 불빛이 세아이의 시야를 밝혔다. 핸드폰 불빛 따위와 비교도 안될 밝은 빛이었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가만, 이 시간에 여기 사람이 있다고? 올라올 때 분명 아무도 없었다. 순찰대라면 대답이 없을리가 없다. 애초에 이 시간엔 사람이 들어올 수 없는 구역이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불빛 뒤로 시커멓고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이 맞다! 제발 구원의 손길이기를! 밝은 빛에 압도된 세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빛을 향해 비명을 질러댔다. “쉿! 침착해!” 낮지만 힘있는 목소리였다. “괜찮아. 가만있어. 내가 갈게.” 밝은 불빛에 먼것 같던 눈앞에 서서히 실루엣이 잡히고, 아이들은 어느새 서로의 손을 꼭 잡은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검고 긴 그림자는 다가올수록 모습을 드러냈다. “케빈? 케빈 리…너니?” 엘라가 외쳤다. 


케빈리. 작년에 한국에서 전학 온 아이다. 서핑과 장난에 미친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리 조용히 구석에서 책을 보는 아이 케빈. 처음엔 다른 아시아계 전학생들이 늘 그렇듯 영어가 서툴러서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본 케빈은 선생님과 현대문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할 정도로 영어를 잘했다. ‘그런데 왜 저러지? 외톨이과 인가?’ 한국인이라는 것 때문이었을까? 엘라는 왠지 그애에게 신경이 쓰이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한국이나 중국 등의 아시아에서 오는 아이들은 여기 하와이아이들과는 달랐다. 바다도, 수영도, 서핑도 그들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오후2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보드를 들고 바다로 달리는 현지 아이들과 달리, 그들은 무언가 심각한 분위기에 바삐 어딜 가곤 했다. 케빈도 그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촬영용 조명을 끈 케빈은 작은 플래시라이트를 켰다. 그리고 단단히 묶은 등산용 노끈을 우리에게 건넸다. “각자 허리에 묶어. 내가 앞에서 밟는 걸 잘 보고 따라와. 슬리퍼는 벗고.” 소녀들은 케빈의 지시에 따라 일렬로 서서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천천히 그를 따랐다. 칠흙같은 어둠과 희뿌연 수증기, 미끌미끌한 바위를 얼마나 걸었을까. 서서히 앞이 보이고 발바닥에 따끔따끔한 풀의 촉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케빈이 멈춰섰다. “휴, 이제 됐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모두 괜찮은거지?” 그 말과 함께 맨뒤에 오던 히사에가 철퍼덕 바닥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히사에가 울자 그 앞에 클레어가 히사에에게 윽박질렀다. “조용! 히사에! 순찰대라도 오면 우린 끝이야! 조용하라고!” 하지만 클레어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케빈의 허리를 잡고 내려오던 엘라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의 허리를 잡았던 손은 어느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니, 케빈이 잡아 준것 같다. 덜덜 떨리는 엘라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케빈의 손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케빈은 메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툭 내려놓고 엘라의 손을 끌어당겼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엘라의 얼굴이 케빈의 가슴에 묻히며 그의 셔츠를 적셨다. 살았다 라는 안도감과 함께 엘라는 참고있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케빈은 엘라의 어깨를 꽉 안아주었다. 케빈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그에게서는 땀냄새와 함께 은은한 머스크향이 났다. 


“여기 앉아도 될까?” 언제나처럼 카페테리아 구석 출구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케빈에게 물었다. 케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끄러워진 엘라는 식판을 들고 뒤를 돌아 가려다가 문득 그의 귀에 꽂혀있는 에어팟을 보았다. 다시 그의 시야에 보이는 정면으로 가서 그에게 식판을 들이 밀었다. 흠칫 놀란 케빈이 엘라를 올려다 보았다. “어, 엘라 멕케스터.” 엘라는 그와 마주앉아 점심을 먹었다. 케빈은 엘라와 밥을 먹는동안 에어팟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엘라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엘라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고마웠어.” “응.” “너는 거기 왜 있었던거야?” “라바 촬영하러. 너무나 신비하잖아.” “아…” 역시 외지인이라 그런가? 라바가 신비하다는 멘트는 현지인들은 잘 하지 않는 말이다. 역시 그도 미국 본토에 대학을 가려고 잠시 온 유학생이구나. 곧 떠날건가. 엘라는 생각했다. “나는 여기 살려고 왔어.” 뜬금없이 캐빈이 말했다. 엘라의 맘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화산이, 라바가 아름다워서, 그래서 살려고 왔어.” 엘라는 그의 대답이 맘에 들었다. 기분이 좋아 미소를 짖고 있는 엘라에게 케빈이 말했다. “난, 항상 네가 궁금했어. 넌 좀 다르다고 느껴졌거든.” “내가 입양아여서 그런걸거야.” “아니, 난 네가 입양아인줄 몰랐는걸.” “그래? 그럼 왜…?” “너에게는 특별한 향기가 느껴져.” 


바이올러지 수업이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터라 더 이상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진행한 수업내용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었다. 두명씩 팀을 짜라는 선생님의 말에 엘라는 서슴없이 케빈에게로 갔다. “케빈, 나랑 같이 하지 않을래?” 케빈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 엘라는 기뻤다. 지난번 밀린 궁금증까지 이번에 같이 팀을 하며 다 해소해야 겠다 생각했다. “케빈, 너 어디 살어? 끝나고 우리집이 좋을까 아님 너희집?” 케빈이 잠시 망설였다. “음…난 노스쇼어에 살어. 차로 40분. 괜찮겠어?” 괜찮냐니, 오히려 좋았다. 케빈은 한국에 부모님이 계시고 혼자 자취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혼자 사는 집에 내가 초대되어 가는거다. 살짝 떨렸지만, 무언가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12시 전에만 오면 괜찮아. 우리 그전에 끝내보자.” 


띵동. 노스쇼어 힐라루아 콘도 12층3호 앞에서 엘라는 긴장한 채로 벨을 눌렀다. 엘라는 평소와 다르게 마스카라와 립스틱을 잔뜩 바르고 엄마가 아끼는 향수까지 뿌린 터였다. 철컥, 문이 열렸다. 케빈은 엘라를 보자마자 실소를 터뜨렸다. “큭큭. 엘라, 어서와.” 큭큭대는 케빈이 낯설었지만 엘라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케빈의 집은 예상보다 더 넓고 밝았다. “와! 저기 쿠아이섬까지 보이는 것 같아! 뷰가 너무 좋다!” 너스레를 떨며 엘라는 거실로 들어갔다. 케빈은 그 사이 주방에서 음료를 따라 나왔다. “엘라, 미모사 좋지?” 엘라는 케빈이 준 잔을 들어 한모금을 마셨다. 


얼마나 흘렀을까. 엘라가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헉!” 엘라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덮여 있던 담요를 들춰 본인의 몸을 살폈다. 바보 바보, 그렇게 아버지께 교육을 받았는데, 이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무얼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던걸까? 엘라는 자신의 핸드폰을 더듬어 찾았다. 오른쪽 허리 옆에 있었다. 엘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케..빈?” 조용했다. 거실은 여전히 밝고 깨끗했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엘라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8시29분. 세상에! 내가 3시간이나 정신을 잃었다니! 케빈을 찾아야했다. 엘라는 일어나 집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거실을 지나 닫혀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은 어두웠다. 엘라는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달칵. 환해진 방을 보는 엘라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우!” 벽마다 화산이 걸려있었다. 시뻘겋고 검붉은 라바의 아름다움이란! 그동안 케빈은 이런 사진을 찍어왔던 거였구나. 그러다 방한구석에 놓인 이젤이 눈이 들어왔다. 바닥에 흩어진 붓들과 물감, 그 옆으로 겹겹이 쌓인 캔버스들. 엘라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덮여있던 흰천을 조심히 들쳐열었다. 순간 엘라의 눈에 들어온건 시뻘건 라바의 강으로 녹아내리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두 사람, 남자와 여자였다. 가만, 조금 더 자세히 보니 엘라와 케빈이 뜨거운 라바 속에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악! 이게 모야!” 엘라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몸이 타들어가는 순간에 웃고 있다니! 엘라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엘라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 방문을 향했다. 여기서 나가야해! 지이잉. 헬라의 핸드폰이 울렸다. 케빈이었다. 

“엘라, 나 옥상에 있어. 이리 올라와바. 내가 정말 아름다운 걸 보여줄게.” 


케빈집을 뛰어나온 엘라는 엘리베이터 다운 버튼을 눌렀다. 그가 옥상에 있는 동안 집으로 도망치자. 3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올라온다.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동안 엘라가 상상해 오던 케빈의 모습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라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옥상층인 15층 버튼을 눌렀다. 엘라는 크게 숨을 한번 쉬고 문을 열고 나갔다. 휘-잉! 밤바람이 엘라의 얼굴을 때렸다. “엘라, 여기야 여기. 이쪽으로 와.” 케빈이 서 있었다. “케빈! 거기서 뭐하는거야.” 팔을 양쪽으로 벌린채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엘라를 향해 돌아섰다. “엘라, 지금 이 향기를 맡아봐. 밤의 향기. 너에게는 꼭 말해주고 가고 싶었어. 너도 밤의 향기가 나는 아이니까.” 엘라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천천히 케빈이 엘라에게 다가와 엘라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고마워, 나의 엘라.” 그가 잡았던 손을 떼고 나자 엘라의 손에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엘라가 손바닥을 열어 보려는 순간, 케빈은 뒤돌아 다시 달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하늘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악! 케빈!” 엘라는 바닥에 발이 얼어 붙은 것 같았다. 엘라의 손엔 작은 라바 조약돌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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