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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없이 살기

밀가루 끊기 8개월의 변화

by 주하

작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사이 옷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서랍 속에 잠자고 있던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3년간 입고 있는 같은 브랜드의 동일한 사이즈였음에도 새로 산 바지는 나에게 맞지 않았다.

허리도 잠기지 않고 불편해서 1년간 옷장 속에 보관해야 했다.

나의 비움 규칙 '1년간 입지 않은 옷은 비운다'를 따르기 위해서는 바지를 비움 바구니 안에 넣어야 했다. 바구니에 넣으려는 찰나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비집고 나섰다.

'기존 사이즈 보다 작은 것도 아니고 욕심 없이 몇 년간 입던 동일한 사이즈로 구입한 것인데 입어보지도 못하고 비워야 한단 말인가...'

작은 희망을 안고 1년 만에 다시 입어본 바지는 여전히 작았다. 허리는 잠기지 않고 허벅지는 부대꼈다.

주변 다른 옷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라인이 들어가거나 핏 되는 하의나 상의를 입으면 불편해서 잘 입지 않고 있었다. 항상 헐렁한 루주핏에만 손이 자주 갔다. 몸은 무겁고 가득가득 채워 넣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기분이었고, 어느새 몸무게는 인생 최대 몸무게에 가까이 다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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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라이프 9년 차로 어느덧 가볍고 단정한 집에 살고 있었지만 정작 내 몸은 그렇질 못했다. 지방이 가득 들어선 '몸이라는 집'은 비좁고 무겁고 갑갑하기만 했다.

바지를 벗고 직감했다. 이제는 몸을 비울 차례가 되었구나!

가벼운 집을 소유하듯 가벼운 몸을 입고 싶은 열망은 21살 다이어트 성공 역사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도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고 있었고, 1년간 매일 저녁 식후에 집 앞 운동장을 10바퀴씩 걸었다. 덕분에 1년 만에 12킬로를 감량할 수 있었다.

그때처럼 매일 저녁 1시간씩 걷기를 해보자니 육아로 인해 어려워 보였기에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는 식단조절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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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하는 것이다. 첫 주에는 탄수화물을 거의 차단해 보았다. 며칠이 지나니 손에 쥐가 나는 증상이 생겨서 알아보니 탄수화물을 갑자기 끊으면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단백질 파우더도 먹으면 속이 계속 부글부글 거려 맞지 않았다.

며칠에 한 번씩 종일 단식도 해보았는데 이 역시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위염으로 다가왔다.

한 달간 여러 변화를 겪으면서 내 몸에 맞는 식단 방법을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밀가루가 몸에 끼치는 안 좋은 영향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빠르게 혈당을 올려 혈관에 손상을 주고 몸에 염증반응을 일으키고, 면역력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알면 알수록 좋을 것 하나 없는 음식이었다. 딱 좋은 것 하나가 있긴 하다.

밀가루 음식은 보드랍고 달콤하게 말캉거린다. 갓 만들어 온기가 배어있는 크루아상 결을 하나하나 뜯으며 먹는 즐거움은 얼마나 큰지.

하지만 혈당스파이크로 식욕을 자극하기에 식단조절을 위해서라도 밀가루 음식 끊기는 필연적이었다.

밀가루 끊기 위해 식단을 짜보니 그동안 즐겨 먹었던 음식 대부분이 밀가루로 만든 식품이란 걸 알았을 때 적잔이 놀라웠다. 밀가루를 제외하고 나니 남은 음식들은 자연스레 자연에서 온 순수한 재료들로 조리한 것들이다.

밀가루를 끊는다는 건 달고 자극적인 음식 또한 멀리함을 의미한다. 달고 자극적인 음식에는 거의 대부분 밀가루가 들어가 있기에.

밀가루와 당성분 그리고 탄수화물이 식단에서 줄어들자 순기능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식사 후 속이 편안하다. 잡곡밥 양도 반공기로 줄이고 자연스러운 단백질 반찬과 채소로 속을 채우니 든든하고 위가 언제나 안락하다.

아침에 조금만 피곤하면 얼굴에 드리우던 붓기가 사라졌다. 인상이 보다 명확하고 얼굴 톤이 좀 더 밝아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밀가루를 끊은 지 9개월 차다. 그동안 총 8킬로가 감량됐다. 거의 달마다 1킬로씩 빠진 셈이다. 첫째를 출산하기 전의 몸무게는 이미 회복했고, 2킬로만 더 빠지면 21살 리즈시절 몸무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여름 허리가 잠기지 않아 못 입었던 청바지는 허리도 전체 라인도 여유 있어 원하던 루주핏으로 잘 입고 다닌다.

처음 결심의 배경이었던 원하는 체중 감량도 분명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몸의 안 좋던 독소들이 비워지고 바르고 건강해지는 만족감일 테다.



밀가루를 끊고 나서야 그동안 밀가루에 얼마나 중독되었는지 자각하게 되었다. 중독에는 강렬한 욕망이 배경이 된다. 우리는 욕망이 채우는 쾌락으로 직면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지만. 그 끝에는 패배적인 현실만 마주하게 된다. 달콤한 쾌락의 유혹은 우리를 벗어나기 어렵게 한다.

어느 날 중독된 자신을 마주하고 이를 끊어낸다는 것은 나의 불안, 두려움, 실패 같은 그늘진 감정 모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런 회색 감정을 받아들임은 당장에 상처가 되지만 회복을 거치며 우리는 한걸음 더 성장하게 된다.

밀가루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내가 좋아지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내 몸에 불필요한 성분들(지방이나 독소같은)이 빠져나가고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 안정감이 나의 행위를 지지해 주었다. 내가 나를 믿어주는 믿음은 삶의 오래된 챕터를 닫게 하고 새로이 한 챕터가 열리게 했다.

지난 몇 년간 둘째를 출산하고 첫째 때만큼 몸이 빨리 회복되지 않아 보이지 않는 소리로 우울했었다. 늘어나고 줄어들지 않는 뱃살과 몸의 군살 그리고 몸무게는 알게 모르게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리즈 시절 몸무게가 눈앞에 다다른 지금, 몸과 마음은 혼자 너른 세상을 마음껏 꿈꾸던 21살의 나로 돌아간 듯하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과 무엇이든 도전해 볼 수 있는 가벼운 몸과 마음을 되찾은 듯한 체감은 나를 응원해 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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