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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청소는 비우기

by 주하


브런치나 블로그 프로필에 어느덧 '미니멀라이프 10년 차'라는 수식어구가 함께 하고 있다. 횟수로 10년 만으로 9년의 기간 동안 함께해 온 키워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낯설고 묘했다. 학창 시절에 오래 달리기와 거리가 멀었던 내게 이렇게 오랜 시간을 내어준 키워드가 또 있었을까. 그만큼 미니멀라이프, 비움이라는 단어들은 내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10년'이라는 숫자는 내게 본론적인 질문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비움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시작은 넓은 공간이었다. 유년시절 대부분을 크지 않은 방을 언니와 공유하며 자랐다. 30 평대집에 5 식구가 살다 보니 어느 공간이고 나 혼자 누릴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알게 모르게 넓고 탁 트인 공간욕이 내면에서 자라고 있었나 보다. 아무것도 없는 심플하고 탁 트인 공간 사진을 볼 때 오래도록 막혀있던 내 안의 자아의 방이 확장되는 듯한 희열이 찾아왔다.

생에 첫 독립의 배경지가 되어준 신혼집이 15평의 작은 빌라였고, 이때 마주한 여백이 가득한 공간 사진이 내게 잠재돼있던 공간욕을 일깨우며 미니멀라이프로 입문하게 되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이어지던 비움생활에 아이 둘이 태어나며 과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는 넓은 공간 + 청소로부터 자유함이 더해졌다. 미니멀라이프가 한 단계 성장할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아이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면서 잡동사니의 꼭짓점은 최고치를 찍었다. 집 안은 온갖 국민 육아템들로 가득했다. 청소라도 하려고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면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두고 나면 벌써 진이 빠지는 것이다. 청소를 하고 오래라도 단정한 집이 유지되면 보람이라도 있지. 천사 같은 아이들에게는 깨끗한 공간을 몇 초 만에 반대로 되돌리는 마법이라도 있는지 깨끗하던 공간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방금 청소하고 돌아서서 보니 다시 어질러진 모습과 마주했을 때(치우는 사람과 어지는 사람이 분리될 때 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깊은 늪에 빠져있는 듯한 절망감이 나를 덮쳤다. 잡동사니라는 늪에서 국민 육아템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더는 이 잡동사니들 때문에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을 재우고 영혼까지 끌어올린 얼마 남지 않은 체력으로 집을 청소하고 소파에 누울 때면 빨리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이런 간절함을 안고서 책 속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때 만난 책 한 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미국의 거실에는 흔한 매트도 없고 아이들 방에도 대형 장난감은커녕 작은 장난감들도 몇 개 없어 보였다. 몇 개 없는 작은 장난감과 아이들만 없다면 전혀 '아이 키우는 집' 같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유럽 나라들의 책들을 살펴봐도 우리나라처럼 흔한 '국민 육아템이 그득한 거실 혹은 방'은 찾을 수 없었다.

아이들 장난감은 최소화로 하고 대신 가족들과 바깥활동 또는 함께 하는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꽤 신선하고 창의적으로까지 보였다. 왜냐면 그때까지 내게 아이 있는 집 거실의 모습은 국민 육아템들로 가득 차있었기에. 그걸 비울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치관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 많은 육아템들만 없는 거실과 집을 그려보니 막힌 숨통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원하는 집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일이 가장 중요하듯, 위의 이미지는 내 상상 속에 꿈꾸던 이상적인 집을 그리게 자극했다.

책과 소파 테이블 같은 베이직한 가구와 물건들로 채워진 단정한 공간이었다. 아이들의 물건이 치대는 곳이 아닌 가족 모두의 편안한 물건으로 마음까지 안정이 되는 공간말이다.

머릿속에 원하는 취향의 공간을 그렸다면 이제는 비울 차례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찾은 듯 하나둘씩 꼭 필요하다고 여겨 의심치 않던 육아 아이템들을 비워갔다. 대형 장난감부터 하나씩 당근이나 나눔으로 집에서 자취를 감췄다. 젖병소독기도 치우고 식세기에 돌리고, 커피포트로 100도씨 끓인 물 대신 정수기에 온수로 바로 분유를 탔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던 그네, 미끄럼틀, 쏘써 같은 아이들도 비웠다. 물건을 비워내는 것은 그 물건을 위해 들여야 하는 나의 노력까지 비움을 의미했다.

특별한 국민 육아템이 없어도 일상은 너무도 태평하고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항상 과부하였던 부엌에 표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요리할 때 부산하고 정신없던 기분은 쏙 빠지고 차분한 고소함이 베어 들었다.

레고와 인형들만 남기고 줄이니 비로소 아이들 물건에도 제자리란 게 생겼고, 잡동사니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덕분에 소설 [폭풍의 언덕]에서처럼 휘몰아치던 감정은 [작은 아씨들]의 배경처럼 소박하고 안락함이 깃들었다.



청소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거나 닦아서 깨끗하게 하는 행위이다. 세상 누구라도 어디서라도 사람이 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청소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청소와 청소 사이에 쌓인 먼지와 때를 쓸어 담고 먼지가 다녀간 자리를 깨끗이 물기로 닦아내면 화사한 바닥이 얼굴을 드러낸다. 이 화사한 산뜻함은 익숙한 공간에도 새로운 긍정의 기운을 불어넣어 우리의 생동감을 고취시킨다.

청소와 멀어질수록 집과 일상 사이마다 오염된 때가 낄 것이고 이는 다시 그 공간을 바라보는 자신에게 돌아와 어느덧 정신까지 어지른다. 하여 우리가 청소를 하는 이유는 집과 오늘을 보다 맑게 다듬고 유지하는 과정이며 이는 나와 내가 속한 삶을 돌보겠다는 의지이며 다짐이 된다.

단순히 집 혹은 방을 청소하는 일이 공간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삶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면 청소는 결코 가벼이 지나칠 일이 아니다. 청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이들이라도 청소에 더 마음이 쓰이게 된다.

예전보다 청소하는 것이 더 좋아졌지만 지금도 내게 청소는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다. 오전의 너른 자유시간 앞에서도 청소할 생각보다 지금처럼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먼저 떠오르기에.

그렇다고 단정한 공간을 싫어하지도 아니 실은 무척 좋아하기에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간결히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비우기'가 꼭 필요하겠다.


집의 잡동사니 비우기는 청소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바닥 줍기'를 많이 줄여준다. 바닥 줍기만 하고 나면 그 뒤에 청소과정은 오히려 간단하다. 깨끗한 바닥을 혹은 표면을 쓸고 닦는 것은 의외로 수월하고 거침이 없기에. 로봇청소기라도 있다면 '바닥 줍기'가 청소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가장 시간을 잡아먹고 귀찮은 '줍기'구간이 줄어들수록 청소의 장벽은 쉬워지고 편해진다.

최고의 청소는 비우기다. 바닥에 걸리적거리는 물건들로의 해방은 큰 의미에서 볼 때 삶에 걸리적거리는 방해물과의 이별로도 이어진다. 걸어 다닐 때나 생활하면서 발이나 시야에 걸리는 게 없다면 그만큼 일상의 저항은 줄어들고 평온함이 드리우게 된다. 주변에 덜 신경이 가고 덜 예민해지고 덜 꺼칠해진다. 곤두세웠던 정신이 차분해지고 나도 모르게 소모되었던 귀한 에너지를 오롯이 원하는 부분에 소비할 수 있게 된다. 순탄한 흐름이 하루하루를 채운다. 내가 있는 곳이 존재하는 곳이 이런 집이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과 안온이 어깨와 마음을 감돈다. 청소를 하고 나면 자연스레 마음까지 정리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잡동사니들을 비우고 나와 가족이 꼭 좋아하는 물건만 남긴다. 남은 많지 않은 물건들에 각자 자기의 방, 제자리를 마련한다. 이를 가족들과 모두 공유한다. 자신의 물건은 자기가 제자리에 둔다. 사용한 이가 그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둔다. 각자 더는 쓰지 않는 물건은 비운다(아이들도 이제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비움과 정리 시스템으로 나와 우리 가족에게 청소가 더는 무겁고 두려운 타이틀로 위협하지 못한다.

일상 중 청소에 할애했던 시간이 줄어들면서 나에게 사용하는 여유가 늘었다. 이는 나를 돌보며 나를 찾아가는 미니멀라이프와 비움으로 발전하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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