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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27. 2023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을 만나는 여행

홍콩

여름밤이면 떠오르는 영화 한편이 있다. 파랑 노랑 불빛의 눅진한 밤. 음식점에서 캘리포니아 드림을 크게 들으면서 일하고 있는 여자와 매일 샐러드를 사러 오는 남자.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술집에 들어온 금발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와 만우절의 이별통보가 믿기지 않은 남자. 네 청춘 남녀의 로맨스를 담은 영화다.

시선을 따라다니는 듯한 영상과 소설을 읽는듯한 감성 가득한 대사에, 서사에 녹아들어가는 배경음악까지. 이 영화 한편은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함께 했다. 임청하도 예뻤지만, 짧은 머리가 어울리는 페이의 매력에 푹 빠져 한동안 숏컷을 동경했으며(결국 용기가 부족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양조위의 눈빛과 금성무의 매력에 한동안 헤어나오질 못했다. 몽환적인 상상력이 장면 사이마다 숨어 있기에 처음 영화를 봤을때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이국적인 정취와 화려한 영상미 그리고 청춘을 닮은 음율에 빠져들었다. 

영화를 본 뒤로 캘리포니아드림과 몽중인을 하루종일 듣곤 했다. 특히 우울하거나 답답한 날 이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10대 시절 이 두 노래를 찾는 시기는 잦았으며, 들을 때만큼은 자유를 느꼈다. 내가 첫 해외여행을 하게 된다면 단연 이 영화의 배경지인 홍콩일거라 짐작했다. 로망이었던 파리행 보다는 물리적 거리도 가깝고 심적 부담이 적기도 했으니까.     

 

사춘기 소녀는 커서 어른이 되었고 홍콩 여행 이전에 호주, 프랑스, 태국, 하와이를 이미 경험하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이 영화가 기억 너머로 묻혀졌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D와 홍콩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잊고 지낸 제목 네글자가 떠올랐다. ‘중경삼림’. 우리는 그날 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중경삼림에 대해 물었다. 역시나 감성보다 이성에 충실한 그에게 중경삼림은 기억에 없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오랜만에 영화를 찾아보았다.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장면들과 익숙한 맬로디가 흘러나올 때 몸에 전율이 일었다. 며칠뒤 홍콩행 티켓 두장을 예약했다. 마침 D의 여름 휴가가 다가오고 있었고, 결혼하고 두 번째 맞는 우리 둘의 휴가였다. 언제든 집을 가장 좋아하는 집돌이지만, 내가 여행가고 싶다고 하면 잘 따라가주는 그가 고마웠다. 역시나 비행기티켓은 싸지 않았지만, 이미 나의 마음은 홍콩에 가 있었기에 더 지체할수 없었다.    

      

3박4일의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의 여행. 첫날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가장 보고 싶던 장소로 향했다. 숙소를 정할때에도 자주 가보고 싶어 가까운 곳 호텔로 예약했다. 걸어서 도착한 곳에 영화 속 장면의 에스컬레이터가 마주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전체 구간이 800m에 달하며 야외 시설중 세계에서 최고로 길다는 그곳 앞에 서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좁은 길 사이로 높은 건물들이 층층 마다 줄지어 있었고 소호 거리에는 이국적인 팝, 식당, 카페들이 지나갔다. 다양한 색의 건물과 외국인들의 교합은 이국적인 정취를 구성하고 있었다. 안에서 밖을 부지런히 살폈다. 페이가 양조위를 살피던 그 집이, 종이비행기를 창밖으로 날리던 그 장면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잡아보려고. 끝까지 올라갔고 걸어서 그 길을 내려왔지만 상상했던 감흥은 따라오지 않았다. 

숙소에서 가까웠기에 첫날도 그다음날도 여행 마지막날까지도 들려보았지만 끝끝내 중경삼림의 홍콩은 만날 수 없었다.     


보고 싶던 홍콩은 보지 못했지만 4일동안 좋아하는 딤섬도 마음껏 먹고, 홍콩의 낭만적인 더위도 실껏 체감하고, 더위를 말끔히 식혀주는 야경의 향연도 가득 느끼고 왔기에 후회는 없었다. 그래도 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헛헛한 마음을 달래러 D와 맥주를 마셨다.

“나는 홍콩 여행을 하면 중경삼림 자취를 만날 수 있을줄 알았어...아니더라고.”

“어떻게 만나겠어. 그 영화는 너 기억속에 존재하는데.”     

D와 대화를 마친 후, 나는 혼자 중경삼림을 봤다.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이 방이 점점 감정이 생겨난다강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이 울 줄은 몰랐다사람은 휴지로 끝나지만 방은 일이 많아진다.’ 

'사람은 변한다. 어제 파인애플을 좋아했던 사람이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영화 속 문장들을 몇 번 이나 노트에 끄적이며 중얼거리고, 금성무 스티커사진으로 다이어리를 도배하고, 캘리포니아 드림을 들으며 방에서 혼자 춤을 추던 10대의 소녀가 장면 마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울한 마음이 가득할 때 양조위 장면을 보며 인형에 말을 걸거나 혼자 눈물을 훔치던 모습까지. 

나는 내가 영화 때문에 홍콩을 찾게 된것이라 여겼지만, 여행을 마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은 영화 속 장면이 아닌, 그 장면과 함께한 그 시절 나의 모습이, 90년대 풍경의 향수가 그리웠던 것임을. 

어린 나는 자라지만 영화는 그날의 모습 그대로 영원히 함께 한다. 우리가 영화와 처음 만난 그날의 모습 그대로. 그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그날의 날씨, 시절의 풍경, 감정의 정서에 싸여있는 나를 만난다는 것이다. 이 영원한 친구와 동행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기억을 추억하는 것이다. 잊혀져 가는 희미한 기억들을 꺼내어 추억하는 것이다. 

그 후로 매년 여름밤이면 아리지만 아름다웠던 10대의 나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나의 인생 친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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