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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22. 2023

밖이 좋은 여자와 집이 좋은 남자가 함께하는 여행

하와이

여행의 시작          


어렸을 적 기억 속 창문 안쪽에는 늘 TV 소리가 들렸다.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할 때에도, 식사 후 거실에 둘러앉아있을 때에도, 대화의 온기보다는 TV 속 대사의 기계음만이 가득했다. 어렸던 나는 우리 가족의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TV가 뺏어간다고 생각했다. 그 작은 상자만 없어진다면 얼굴을 마주하며 각자의 오늘을 궁금해하고, 생각의 소리를 공유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이야기 하면서도 그때 나는 내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린 나는 단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친구들 집처럼 평범한 창문 안쪽의 풍경이 우리 집에는 없다는 사실을. 서로를 향한 사랑이 결여되있음을, (결여된 건지 표현하지 않은 건지 까진 모르겠지만 그 둘은 적어도 내게 동일한 언어이다.)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는 순간 불행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든 잘못을 TV에게 몰아놓은 채로, 작은 기계만 원망하는 수밖에. 그렇게 모든 불행이 담긴 TV에게 달아나고 싶었다. 가능한 멀어지고 싶었다. 그 차가운 기계음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하루에 한 번 짧은 산책으로라도 바깥공기의 신선함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감기가 걸리거나 몸이 아파서 며칠이고 밖에 못 나갈 때면 몸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파왔다. 갑갑한 마음이 몸을 더 아프게 만들곤 했다. 며칠을 앓다가 밖으로 동네 산책만 나가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정체돼 있던 공기가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신선함을 폐 속으로 흡입할 때면 마음 깊은 곳까지 활력이 차올랐다.

산책은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안쪽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떠날 수 있는 짧은 여행말이다. 어른이 되어 돈을 벌고부터는 짧은 여행 대신 더 긴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안쪽과 멀어질수록 그곳에서 마주하는 평화는 더 길고 오래 지속되었다. 이렇듯 여행은 내게 삶을 살아가는 태도였으며 살아가게 해주는 구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집보다 밖을 99% 좋아하는 밖순이 라이프를 살아왔다.               




사랑과 여행은 이야기를 갖는다          


사랑과 여행의 공통점은 둘 다 이야기를 갖는다는 점이다. 사랑은 그와 그녀 사이에 새어 나오는 습관들, 결점, 이해 같은 것들이 공유되어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여행 또한 그날의 풍경, 시간, 사람 같은 요소들이 조우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갖는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이 시작되고 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d와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날은 추운 겨울이었다. 우린 레스토랑에서 만나 뽀모도로 스파게티와 해산물 토마토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여행 좋아하세요?”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집이 가장 좋아요. 집에 있는 걸 좋아해요.”라고 대답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30년가까이 지냈고 전기 엔지니어인 그는 영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었고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가 '전기'였다. 우리 대화 속 공통점은 하나도 없었다.  여행코드도 정 반대였다. 단 하나 마주하고 있는 그의 얼굴이 나와 닮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끈기도 없고 지구력도 부족한 내게 그의 한결같음은 조각상처럼 굳건해 보였다.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마다 d에게 묻곤 했다. “우리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는 게 좋아?”라고 여행의 목적지를 물을 때면 그는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집이 좋아. 집에 있는 게 가장 좋아”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와 그의 안도하는 모습을 느낄 때면 진심이라는 게 보였다. 그 후로 목적지 선정은 나만의 몫이 되었고, 밖순이였던 나는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어서 좋았다. 분명 여행지에서 맛집이나 갈만한 곳을 같이 알아보는데 내가 알아본곳이 더 만족도가 높다는 둘 모두의 결론이 나고부터 여행 계획까지도 나의 몫이 되었다.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한결같다의 동의어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고, 변함이 없다는 것은 언제나 감정의 기복이 없다는 뜻이다. 부지런히 알아보고 온 여행지의 맛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할 때, ‘여기 어때? 맛 괜찮지?’라고 물어볼 때면, ‘난, 다 똑같다.’라는 밍밍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정말 맛있어서 물어보는 질문인데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보면 진짜 평소랑 똑같은 표정이라 더 이상 탓하지 않았다. 그래, 미각이 둔감한 사람도 있는 거겠지라고 위안하면서.

하지만 그 대상이 하와이라면 또 다른 문제로 다가올 테다.     



1년 후, 우린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 있었다. 지난 며칠간의 힘든 숙제를 통과하고 받은 보상인 만큼 달콤했다. 10일간 휴가의 첫날 저녁. 호텔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걸어서 해변으로 향했다. 떠나온 어제의 겨울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만큼 기분 좋은 여름밤이었다. 해가 저물어 하늘은 오렌지빛으로 번지고 그 아래 바다는 투명하게 어둠을 빛내고 있었다. 여린 바람결이 우리를 감싸고 등 뒤로 따스한 모래알갱이가 보드랍게 부서졌다. 결혼이라는 사랑의 설렘 때문인지, 하와이라는 여행의 시작 때문인지 확실치 않지만, 눈앞의 풍경이 아리도록 아름다웠다. 이국적인 여름 밤하늘의 정취에 취해 “너무 예쁘지 않아?”라고 그에게 물었다.

“부산 해운대랑 똑같은데 뭐” 또 그의 000은 다 똑같아.라는 공식을 그 장소, 그 시간에서도 듣자 믿기지 않았다. 매일 한결같은 그이지만 그래도 인생에 한 번뿐인 신혼여행지 그것도 아름다운 섬 하와이인데, 이 모든 낭만을 그는 단 하나의 수식어 ‘똑같아’로 묶어버렸다. 물론 해운대도 아름다운 해변이 맞다. 나 또한 그와 해운대 여행을 갔을 때도 참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해운대란 나고 자란 곳으로 ‘그냥 동네 바다’의 표현과 같다는 걸 알고 있었다.

d의 대답에 할 말을 잃고 하늘을 보며 생각해 잠겼다. ‘이 결혼 잘한 걸까? 이렇게 무미건조한 남자랑 어떻게 한평생을 살지?’라는 미래의 걱정과 불안을 삼키면서.      


신기하게도 둘째 날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어서일까, 어제의 불안 따위는 금세 잊혔다. 이곳은 하와이, 천국의 섬 아닌가. 호놀룰루에서 위치 좋은 호텔에서 묵어 어디든 걸어 다니기 편했다. 고급 레스토랑도 분위기가 좋았지만, 현지인 맛집 같은 편한 식당이 더 맛있었다. 매일 우동집에 줄을 서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현지 맛집 투어를 다녔다. 알아보고 간 곳보다 걸어가다 사람이 많아서 들어간 가게가 더 만족도가 높았다. 저녁을 먹고 어김없이 와이키키 해변으로 향했다. 텀블러에 와인을 담아와 여름 밤바다를 안주 삼아 마셨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가장 맛있는 와인이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넷째 날부터 렌터카를 타고 근교로 짧은 여행을 즐겼다. 아울렛에 가서 서로에게 사줄 선물도 고르고, 가족 친구들의 선물도 샀다. 하나우마 베이에 가서 물고기들과 스노클링도 함께 했다. 하와이에서 모든 시간이 천국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사라지는 시간을 잡아 멈추고 싶었다.

첫날의 걱정과 달리 그의 한결같은 온화함이 여행 내내 기복이 큰 나를 평온하게 해 주었다.

더 이상 그에게 낭만을 기대하지 않자 실망할 일도 없게 되었다. 낭만을 보는 대신 일상이 주는 편안함을 보기로 했다.


하와이 이후에도 우리 사이에 다양한 여행지가 다녀갔다. 그러면서 나는 그처럼 집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는 여전히 한결같이 집을 좋아한다.

더 이상 창문 안쪽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 여행을 하게 되었다. TV 소리 대신 서로의 오늘을 궁금해하고, 웃음소리가 배어 있는 온기가 있는 집으로.

이제는 여행이 끝나고 돌아올때 그보다 더 빨리 집돌이 단골 멘트를 하곤 한다. “역시 집이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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