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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20. 2023

케렌시아로 떠나는 여행

몽생미셸

영혼의 안식처          


사진 한 장이 그 여행의 시작이었다. 파리 여행 4일 차에 새 룸메이트가 왔다. E는 이제 막 파리에 짐을 풀었고, 나에게 파리는 저물고 있었다. 서로의 일정을 물어보던 중 E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여행 책자에 있는 사진이었다. 유명한 관광지라면서 파리에 왔으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근교에 있는 섬으로, 왕복 800km 정도로 서울에서 부산 거리 정도였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분명 남아있는 파리를 관광이 아닌 ‘산책’만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라는 다짐도 사진 앞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신비한 성의 모습에 한순간 매료되었다. 마침 E도 혼자였고 우린 함께 떠나기로 했다. 

E가 투어는 비싸고 일정이 빡빡하다며 기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기차를 타고 가다 버스로 갈아타는 일정이었다. 베테랑 여행가처럼 보였던 그가 든든한 마음에 따라갔다. 새벽 5시에 기차역에 갔다. 조금 헤매긴 했지만, 제시간에 올라탔다. 도시의 풍경이 점점 목가적인 그림으로 바뀌었다. 파리의 화려한 모습만 보던 프랑스가 낯설게 느껴졌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르던 풍경과는 달랐지만 비슷한 감정이 일었다. 도시를 떠난다는 기분은 낯설게 느껴졌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새로운 모험처럼 다가왔다. 

창밖에서 점점 우리의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다가갈수록 눈앞의 광경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계와 분리돼 있는 풍경이었다. 천년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어서일까, 얕은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 위에 떠 있는 성은 꿈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성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마을이 나왔다. 좁은 골목들이 이어지고 레스토랑이랑 기념품 가게들이 보였다. 우리는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길을 나섰다. 투어는 아니었지만 돌아갈 버스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지체할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 가고 싶었다. 수도원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은 많았지만 빈 공간마다 안온한 역사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고불고불 계단을 오르고 올라 끝에 다다른다. 시야가 탁 트이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성을 둘러싼 얇은 바다와 물이 다녀간 하얀 모래 띠. 너머로 펼쳐지는 평야와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그 길고 가는 선은 끝없는 영원 속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천년의 바닷속 안에 잠겨있는 느낌이었다. 세상은 잠들어 있고 농축된 고요함만이 적막을 가르며 바람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절대적인 평화였다. 세상의 어떤 해로움도 끼어들 틈이 없는 100%의 무해함이 시간 속에 흐르고 있었다.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탑 꼭대기에서 내려와 성 외곽 벽을 따라 걸었다. 내부와 다르게 외곽 길은 한적했다. 여행의 긴장이 풀린 E와 나는 넓은 돌담 위에 누웠다. 각자의 하늘을 보며 쉬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다니고 갈매기가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재잘재잘 밝은 소리가 들려왔다. 단체로 견학하러 온 작은 아이들이었다. 초록 눈이 마주치자 꽃잎처럼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이들을 따라 밝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에 여전히 청징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순수함, 고요함, 무해함, 평온함의 온기에 둘러싸여 하늘을 보고 있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타락함, 소음공해, 해로움, 파괴성에 노출되었었는지 반증되는 순간이었다. 나비가 되고 싶은 애벌레가 고치를 벗어버리듯, 내 영혼을 둘러싸고 있던 거친 표피들을 벗고 싶었다. 가능한 만큼 매끄럽고 맑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깊은 호흡을 했다. 그 공기로 폐 깊이 채우고 나면 내 안의 타락함, 소음, 해로움, 파괴성들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숨 쉬었다. 편히 쉼을 찾은 그곳이 내게 천국이었다.               

 


눈이 내린 풍경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 드디어 기다리던 첫눈이다. 먹던 밥을 후다닥 먹어 치우고 장갑을 챙겨 밖으로 나온다. 내 손톱만 한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다. 하얀 세상이 눈앞에 내리고 있다. 까만 밤하늘,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 아래 눈의 나라가 펼쳐진다. 모자 사이로 파고드는 결정들이 닿은 두 볼이 발갛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순백의 매끄러움 위에 몸을 뒹군다. 꼭 구름 이불을 두른 듯 뽀드득 사각거림이 보드랍다. 장갑을 벗고 맨 손위에 하얀 송이들을 올린다. 별을 닮은 눈꽃들이 살결 위에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본다. 눈앞의 소멸되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빨간 손이 시린 것도 잊은 채, 1년간 기다려온 순간에 빠져든다. 온몸으로 눈의 세계를 소유한다. 온 마음에 눈을 담아 넣는다. 

어느새 하나둘 모인 동네 친구들과 동네 작은 언덕에 모여 눈썰매를 탄다. 큰 박스나 두꺼운 비닐 등을 하나씩 가져와 바닥에 깔고 내려간다. 작은 언덕이지만 눈이 내리면 제법 근사한 우리만의 눈썰매장이 되어준다.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신나게 썰매를 즐긴다. 엉덩방아를 찧어도 즐겁다. 느리게 내려가든 빨리 내려가든 우리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추위도 잊은 채 공기에 쌓여가는 차가운 눈을 가르며 오르고 내리며 겨울을 타고 있다.

박스나 비닐이 너덜거릴 때쯤 눈을 굴리기 시작한다. 작았던 눈이 어느새 머리가 되고 몸이 되어 사람의 형태를 갖춘다.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가져와 단추와 팔이 되고 눈 코 잎이 되어 반갑게 인사한다. 자기만의 눈사람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헤어진다. 다음날이 되면 분명 잊어버릴 테지만, 그렇게 처음 만난 눈사람을 위한 작은 그리움을 안은 채로 축축해진 장갑을 벗고 집으로 터벅터벅 눅진한 발걸음을 옮긴다. 또 하나의 겨울이 마음에 쌓여간다. 

어릴 적 나는 눈을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눈이 내리면 모든 것이 하얘진다. 땅 위의 지저분한 것들, 과거의 지우고 싶은 기억들, 스치고 갔던 아픔들까지 모두 덮어버린다. 마음속 울퉁불퉁했던 표면은 매끄럽고 투명해진다. 눈이 내린 자리는 하얀 도화지가 되어 동화 속 세상처럼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문장만 가득 자리한다. 나는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내가 원하는 세상을 그려본다. 눈밭에 데구루루 구르면서 옷이 젖는 것도 모르면서. 내부에 쌓였던 찌꺼기들이 눈에 섞여 함께 녹아버릴 때까지. 

그땐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눈의 세계는 어린이에게 쉼 그 자체였다. 알아 온 세상은 작을지라도 분명 어린이의 세계에도 그에 맞는 크기의 아픔, 상실, 불안 등이 있었을 테다. 세계관이 정립되지 않은 작은 아이에게는 자신이 왜 힘든지, 어디가 아픈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기분이 안 좋다. 마음이 아프다가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들이기에. 작은 어깨에 쌓였던 무게를 하얀 눈밭 위에 훌훌 털어버리고 즐거운 감정을 그 위에 새로 쌓음으로써 쉼을 가졌으리라.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다. 새하얀 세상과 겨울의 수평선이 마주한다. 예전의 아이처럼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눈이 찾아온 풍경을 좋아한다. 맨 손위에 눈꽃송이가 녹아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던 순간과 천년의 돌담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이 눈과 함께 내리고 있다. 투명한 윤이 나는 기억들이 안식처가 되어 나를 포근히 안아준다.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인생속에 있다. 여행은 미래로 나아가는 발돋움이기도 하지만 기억속으로 이끌어주는 통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기쁨만 가득하지도, 슬픔만 찾아오지도 않는다. 는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공간과 시간의 여행을 이어감으로써 하루를 단단하게 살아가는 힘을 얻을 뿐이다. 오늘은 인생의 또 다른 이름이기에. 그렇게 인생은 여행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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