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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13. 2023

여행을 사랑하게 된 여행

브리즈번

두려움과 마주하기    

      

편도티켓이었지만 마음속 그린 시간은 넉 달 남짓이었다. 랭귀지 스쿨에 석 달 정도만 다니고 한 달은 쉬다 오려고 했었다. 넉 달의 시간이 지나자 마음속 그림은 달라져 있었다. 겨울이었던 서울로 돌아가기보다 여름인 이곳에 남고 싶어졌다. 서울은 봄이었다. 시간적 계절은 핑계에 불과했다. 기억 속 계절이 아직 겨울이었지, 계절은 잘못이 없었다. 언제 돌아갈 날을 떠오르기보다는 그냥 머무르고 싶었다. 안 가본 다른 여름이 궁금해졌다. 누사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거리의 브리즈번을 향해 두 번째 캐리어를 닫았다.     

브리즈번 시티. 넉 달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여행은 나를 도시 속으로 걸음을 옮기게 했다. 1 존인 시티에 숙소를 구했다. 걸어서 10분이면 도서관도, 예쁜 공원도, 백화점도 있는 번화가도 모두 닿는 거리였다. 숙소를 구하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이 여행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그냥 쓰기만 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버는 게 마음이 편했다. 이력서를 쓰는데 신기했다. 나이를 적는 칸이 없는 것이었다.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아무도 나이를 묻지 않았다. 나이부터 대답해 왔던 과거의 면접들이 떠올라 생소했다. 시티에서 외국인이 현지 가게에서 일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는데 운이 좋게도 바로 구할 수 있었다. 시티에 있는 머핀 가게였다.  진열하고 포장하고 틈틈이 주문도 받는 일이었지만, 간단했다. 8시에 출근해 12시까지 근무였다. 일이 끝날 때면 매니저가 종종 머핀을 싸주곤 했다. 포장해 준 걸 들고 사우스뱅크로 걸어갔다. 강을 따라 길게 늘어진 공원에는 작은 바다가 있었다. 도시 한 복판에다 바다라니. 처음 이곳을 보고 무척이나 놀라웠다. 스트리트 인공비치. 부드러운 모래가 깔려있고 깨끗한 상아빛 물까지 진짜 해변 같았다. 이 멋진 곳이 무료다. 누구나 와서 편하게 도시의 바다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머핀을 들고서 해변가에 앉는다. 실내였으면 그냥 대형 수영장 느낌이었을 텐데, 탁 트인 야외다. 낮고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고, 그 아래 밝은 신록이 가득한 큰 나무들이 가까이 줄지어 있다. 오트밀 색 모래사장 위에 사람들이 누워 따사로운 햇볕을 쬐고 있고 그 앞에 작은 파도가 넘실거린다. 한가로운 물의 풍경 사이로 높이 솟은 빌딩이 이질적으로 자리한다. 사람들은 수영하고는 옆에 있는 바베큐장으로 가서 맛있는 파티를 시작한다. 사람들의 표정은 보드랍고 거리 위의 공기도 구름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한 번도 도시의 일상 한가운데서 보지 못한 얼굴이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도시에서는. 

신발을 벗고 맨발을 모래에 끄적이면서 머핀과 커피를 마신다. 속을 채우고 가방 안에 다이어리와 연필을 꺼낸다. 마음속 겨울이 찾아오고, 말을 내뱉지 않던 시간 동안 다이어리에 글을 적었다. 그러지 않으면 속이 곪아 터질 것 같아서. 길지 않은 글이라도 외부에 투척하다 보면 속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나를 잃고 싶지 않은 몸부림이었으리라.          

호주에 여행을 올 때도 그 다이어리와 연필을 챙겼다. 혼자 떠나온 이 낯선 곳에서 할 말을 내뱉지 못해 속에 쌓아둔 날이면 다이어리에 적 곤했다. 그런 날이면 잠의 뒤척임이 줄어들었다. 이날도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오후 2시 창가의 따스함 같은 것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이 감정이 무언 지는 몰랐지만 기억에 남기고 싶어 다이어리를 열었다. 연필이 사각사각 사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순간의 기분과 마주했다.           


도시 한복판에 작은 바다가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시티의 많은 아파트가 수영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부러 수영장이 있는 곳을 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구하고 보니 수영장이 있었다. 그것도 실내가 아니라 1층 실외에 있는 수영장. 작지만 부대시설이나 퀄리티가 호텔급이었다. 수영을 즐길 시설이 주변에 많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숙소의 수영장은 인적이 드물었다. 낮에 하는 수영도 좋았지만, 밤에 하는 수영을 좋아했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룸메이트와 나 이렇게 둘이서 수영을 자주 했다.      



하루는 이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였다. 내가 모래사장에서 계속 앉아만 있자 L이 나를 불렀다. 한, 두 번 거절하는 나를 L은 가만두지 않았다. 내가 수영을 못 한다고 대답하며 거절하자, L은 자신이 수영을 잘한다고 잘 가르쳐 준다고 답했다. 더는 숨을 곳이 없었기에 바다로 들어갔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L은 친절했다. 겁을 먹고 있는 나에게 짜증을 내기는커녕 다정한 미소로 힘을 나게 해 주었다. 할 수 있다는 격려뿐만 아니라. 그는 정말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수영을 잘 가르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단 몇 시간 만에 나는 자유형을 하고 배영을 하고 있었다. 나보고 재능이 있다는 칭찬과 함께 L은 뿌듯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반에서 친했던 친구 K와 K 언니와 함께 동네 수영장으로 놀러 갔다. 한참을 신나게 놀다가 갑자기 발이 땅에 닿지 않았고 나는 물 안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숨을 쉬지 못했고 허우적거렸다. 살기 위해 눈앞에 K와 K 언니의 몸에 손을 뻗었다. 필사적으로 그들을 잡으려 했고, 마침내 이런 나를 보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 분명 수영 교실을 1년 넘게 다니고 있었는데 어린 나에게 어른 깊이의 수영 물이 버거웠던 것이었다. 수영을 능숙하게 잘했던 그들과 달리 나는 초보였고 겁을 먹었다. 다행히 그들 덕분에 살 수 있었지만, 그날 그 짧은 몇 초의 순간이지만 물이 삼키는 공포는 어른이 되어서도 쭉 나를 따라다녔다. 

물은 바라만 보며 좋아했고, 웬만하면 들어가려 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은 희미해져도 그 감정은 오래도록 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선샤인 비치에 들어갈 때도 발이 닿는 낮은 곳에서 물장구를 칠 뿐이었다. 발이 닿지 않는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수영을 다 하고 우리는 바베큐 파티를 했다. 탁 트인 공원에서 해가 저물어가는 선셋을 바라보며 불을 피우고 고기와 마늘빵을 구웠다. 다 먹고서 디저트를 먹을 때쯤 L에게 다가가 나의 물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덕분에 오랜 두려움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L은 자기가 그렇게 큰일을 한 거냐고 장난스레 반문했지만, 눈빛은 달랐다. 

“분명 끌어준 건 나였지만, 헤엄을 친 건 너였잖아. 두려움과 마주할 용기가 있었던 거야. 그거면 됐어.”라는 말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의 말을 잊고 싶지 않아 다이어리에 적어두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배영을 처음 해본 그날이 아직도 선연하다. 팔이 가르는 물의 소리와 몸을 매끄럽게 감싸는 바다의 감촉 그리고 까만 하늘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별들까지. 온 세상은 고요하고 오로지 나의 지구만 밤하늘을 가르며 떠 있는 기분을. 그 고요한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꺼내 보고 싶은 추억을. 두려움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면 결코 소유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 자신이 조금은 자랑스러웠다. 더는 숨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헤엄을 쳐 나간 나의 작은 움직임들이 조금은 대견스러웠다. 아니 실은 소리를 지르고 싶어질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여행을 사랑하게 된 이유       


현지인들과의 대화가 늘어갈 수 록 언어의 한계에 부딪혔다. 문장은 문법이 틀려도 만들어 낸다고 쳐도 발음은 어려웠다. 가게 손님들이나 동료들은 어학원 선생님처럼 친절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빠른 속도와 원어민의 억양과 발음을 따라가기 힘들 때가 많았다. 잘 듣고 싶고 잘 전달하고 싶어 미드를 보기로 했다. 인터넷에 다운받으려 하니 접속이 되지 않았다. 셰어하우스의 마스터에게 이야기하자 돌아온 답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여기는 뭐든 넉넉잡아 한 달은 기다려야 해. 한국처럼 바로 오지 않아" 한국에서는 as든 출장 서비스이든 아무리 길어도 1주일 내로 받아볼 수 있었다. 빠르면 바로 다음 날에도. 


그제야 그동안 스쳤던 풍경들이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저녁 6시가 되면 가게들이 문을 닫고 거리는 더 안온해지고 사람들은 가족과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TV도 재미있는 채널이 많이 없어서인지 잘 안 보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함께 먹는 식사 시간이 의미가 있어 보였다. 식사 또한 풍성한 샐러드와 스테이크, 맛있는 디저트까지. 정성스러운 메뉴와 함께 가족들 간의 대화가 함께 했다. 주말이면 별다른 문화시설이 없는 이곳에서는 주로 해변에 가거나 공원이나 집에서 바베큐 파티를 즐겼다. 공원에 누구나 사용 가능한 바베큐 시설이 잘 갖춰진 모습을 보면 이들의 문화가 잘 보였다. 서로 같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삼삼오오 모여서 고기를 구워 먹고 별미로 마늘 바게트까지 구워 먹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탁 트인 자연이 어우러진 장소에서 맛있는 음식들과 오가는 즐거운 대화들을 나누다 보면 좁았던 마음속 창의 크기가 길게 넓혀있었다.

평일인데도 점심을 먹고 공원에서, 해변에서 산책하거나 누워서 일광욕하는 사람들, 사이즈가 어떻든 짧은 숏팬츠나 미니스커트를 거리낌 없이 입는 여자들, 어디든 길바닥에 털썩 편하게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까지... 브리즈번도 규모는 더 커졌지 어딜 가든 나무들은 한가했고, 사람들의 표정은 부드럽고,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지금까지 내가 살던 곳과 정반대의 모습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한국처럼 '빨리빨리' 단어가 없었다. 현지인들은 이 속도를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고 나 같은 타지인들에게나 답답함이 존재할 뿐이었다. 야근 문화도 잘 없고 6시가 되면 칼퇴근이 당연하다고 했다. 현지에서 오랜 생활을 이어온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이렇게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시간 사이마다 쉼이라는 틈이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누렸던 빠른 서비스들이 누군가의 '빨리빨리'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자 빠른 속도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빨리빨리' 행동하기 위해 그들의 스케줄은 빽빽하고 빈틈이 없었을 것이다. 여유 없는 업무 표는 마음의 여유를 앗아가고,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한적하게 산책하거나 일광욕할 여지를 주기 힘들 것이다. 야근이 잦은 일상으로 인해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쳐도 웃음 대신 무표정이 먼저 나왔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꿈이라는 목표, 성공이라는 목적을 바라보고 하루에 잠자는 시간을 빼고 '빨리빨리'의 쳇바퀴 속에서 굴러다녔다. 매일 야근의 연속이었고, 일에 찌든 나는 처음 보는 타인에게 보낼 웃음은 남아있지 않았다. 쉬는 날에도 머릿속에는 일 생각이 그득했고 일에 분리되어 온전한 쉼을 가져보질 못했다. 쉬는 방법 자체를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 맞겠다.          



편도 티켓 여행 중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문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돌아갈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한 곳에 매여 문을 닫아두는 정박성이 아니라 마음길 닿는 곳 따라 새로이 열게 되는 이동성이다. 

나의 마음길은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있었고, 브리즈번에서 마지막밤이 찾아왔다. 친해진 친구들과 집에서 작은 파티를 했고 길지 않지만 짧지도 않았던  브리즈번을 함께 추억했다.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 밤수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친구들이 가고 혼자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낮에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며 다이어리를 적었다. 

비밀의 화원이 숨겨진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나를 이끌었던 선샤인 비치. 

수영장이 딸린 도시의 아파트에서도 나를 향했던 작은 바다.

그곳에서 나에게 다가왔던 작지만, 선명하던 편린들을 다이어리에 적고 싶었지만 언어화하지 못했다. 그 처음 느껴본 감정들 앞에 어떤 언어를 붙여줘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그저 단편적인 기억들을 적어두기만 했다. 모래의 까슬한 감촉, 물을 가르던 시원한 매끄러움, 초록빛이 흔들리는 바람결, 반짝이는 별의 빛들, 처음 보는 타인의 보드라운 미소 같은 것을.


아무도 없는 작은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 차갑던 물이 몸을 담그자 금세 따스하게 감싸온다. 선명한 기억을 담고자 물안경도 바깥에 남겨둔 채로 땅에 발을 딛고 물에 몸을 띄운다. 팔은 하나하나 저으며 물속을 만진다. 힘을 뺄수록 저항은 줄어들고 앞으로 나아갈 힘은 커진다. 올려다본 까만 하늘과 나 사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 끼고 있던 물안경마저 없애자 밤과 별이 더 낮아진다. 나의 물에 쏟아져 내린다. 나는 그렇게 밤이 되고 별이 되어 물 위를 한참 동안이나 떠나간다. 이 순간 언어화하지 못했던 단어가 떠올랐다. 내맡김.

지독하리만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어느덧 목의 빳빳했던 긴장은 풀리고,  걱정, 강박, 불안 같은 몸 구석구석 붙어있던 저항이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만큼은 물과 밤과 별과 하나였다. 


그제야 나를 따라다녔던 겨울에서 나오는 길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과거의 문이 닫힌 것에 얽매이고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문이 닫혔다기보다 새로운 길을 위해 열어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저항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나를 오래도록 지배해 왔던 불안으로부터 조금씩 나올 수 있었다. 

호주에서 여행을 구성했던 작은 편린들 덕분에 어느새 나의 오랜 겨울은 다시 여름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나는 여행을 사랑하게 되었고, 여행 속 마주하는 바다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직도 발이 닿지 않는 바다는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바라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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