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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08. 2023

겨울에서 여름을 찾는 여행

누사

상실의 크기     


상실은 냉정하다. 떠나간 존재의 빈자리에는 시린 겨울만이 가득 남게된다. 함께한 여름은 기억속으로 사라지고 점점 그 흔적조차 잊혀져간다. 상실에도 크기가 있다. 작은 것들일 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배를 부르게 하고 쌓인 언어들을 내뱉으며 비워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크기가 전부였을 때는 다르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음식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내뱉는 언어들은 소리를 잃어버린다. 마음속 켜켜이 쌓인 상실은 소리 없는 눈물로 흐를 뿐이다.

K와 나의 꿈이었던 문을 닫는 날, 내 마음의 문도 닫혔다. K에게 괜찮다는 말과 애써 웃음을 건넸다. 꿈 없는 잠을 자고 일어나 텅 빈 하루를 마주하고 나서야 상실의 크기가 다가왔다. 나는 나를 잃고 언어는 소리를 잃고 꿈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렇게 깊은 겨울이 찾아왔다. 바깥은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이 만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감과 가을이 다가옴을 모른 채 석 달의 시간을 뒤로 보냈다.

하루는 엄마가 나의 검정 롱 패딩을 들고 와 침대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잠깐이라도 신선한 공기 좀 마시고 오라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분명 가을이었는데 어느덧 하얀 겨울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지 않았지만, 태양은 구름에 숨어있었고, 차가운 공기는 엷은 막을 세상에 두른 채로 겨울의 채도를 꾸미고 있었다. 오랜만에 거리를 걷는 두 다리는 해동되는 고기처럼 뻐걱거렸다. 여전히 마음은 소리를 잃고 언어는 빛을 싫어했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잎을 다 잃어버린 나무를 바라보았다. 내 모습이 겹쳤다. 모든 잎을 떨어뜨린 채 차가운 바람에 그저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 나무에는 봄이 찾아오겠지. 그럼 나의 봄은...

겨울 뿐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내일을 그려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나무와 다르게 나의 내일은 불투명하기만 했다. 내가 가야 할 봄을 내가 찾아야 했지만 그럴 의지가 나질 않았다.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영속의 겨울에 잡아먹힌 기분이었다. 나는 커다란 상실에 압도당했다.     

짧지만 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엄마가 넌지시 건넸다. 해외연수라도 다녀와. 떠나있다 보면 좋아질 거야. 짧은 문장들이었지만 깊게 들었다. 아무 대답 못하고 방에 누웠다. 조용한 천장을 바라보는데 오래된 창문 쪽에서 바람이 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리고 얇은 바람이 방안 공기를 만졌다. 나는 추위를 이기고자 본능적으로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겼다. 막 덮은 이 불안에 온기는 없고 냉심함만 가득했다. 문득 이 추위가 지긋지긋했다. 따듯한 햇볕이 그리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태양 아래 가만히 누워 있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과거를 떠올릴 필요가 없는 곳에서.

한 달 후에 나는 다시 까만 롱 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랜 여행을 위해 편도티켓 한 장과 캐리어를 끈 채로. 열몇 시간의 비행 끝에 공항에 내렸다. 나는 화장실에서 겨울을 벗고 여름을 입었다. 그렇게 나의 겨울에서 여름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 여행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이 되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여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영화 속에 나올 것 같은 단독주택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고 길 사이사이마다 브라키오 사우르스가 맛있게 먹을 법한 나뭇잎들이 달린 거대한 나무가 자리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반갑게 눈인사하거나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길을 돌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 보는 타인의 웃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유학원에서 예약해준 홈스테이 집은 상상 이상으로 근사했다. 어렸을 때 잠깐 살아보았던 단독주택과는 차원이 달랐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3층짜리 집이었다. 푸른 눈동자의 호스트를 따라 들어간 방에 짐을 풀었다. 한쪽 벽이 모두 통창으로 되어있었고, 창문을 열어나가면 작은 정원이 놓여있었다. 아담한 연못을 소유한 정원에 큰 나무들이 구겨질 듯 무성하게 담겨있었다. 그 사이사이 새들의 지저귐이 따스한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창밖 풍경을 바라만 보아도 두 눈으로 가득 들어오는 초록의 신록과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는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제의 세상과 정반대였다. 추위가 가득한 작은 공간 안에 갇혀있던 나에서 나만의 정원을 소유한 채 여름의 따사로운 햇살을 흡입하고 있었다.      

유학원을 찾아가 상담할 때 나는 되도록 한국 사람이 없는 아니 그냥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을 부탁했다. 언어가 목적이라기보다 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나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곳을 추천받았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한국인도 별로 없고, 보통 사람도 별로 없는 작은 바닷가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이라면 조용히 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다음날 홈스테이 호스트의 도움으로 랭귀지스쿨에 첫 수업을 들으러 갔다. 일본, 중국, 한국, 영국, 미국 등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그저 명분상 두른 목적이기에 수업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빨리 수업이 끝나고 나의 비밀의 화원에 돌아가 쉬고 싶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자 어제 인사를 나눈 홈스테이 메이트가 다가왔다. 같은 성별에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에 마음이 열렸다. 근처 바닷가로 수영하러 가자는 제안에 흔쾌히 집을 나섰다.     

여기서는 비키니에 비치타올을 걸치고 걸어간다고 했다. 해변이 바로 코앞도 아니고 10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도 라고 반문하자. 뭐 어떠냐고, 여기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리고 여긴 다 그렇게 다닌다고 답했다. 그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그녀처럼 비키니를 입고 비치타올을 걸친 채 길을 나섰다. 어쩌면 비키니 착용 보다 더 놀란게 맨발 보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십여 분 거리의 길을 걸어가면서 땅바닥에 뾰족한 것은 없는지 위험은 없는지 쳐다보느라 바닥만 보고 걸었다. 바다의 시큼함이 가까울 때쯤 고개를 들었다. 멀리 해변 입구가 보이고 사람들이 보였다. 땅만 보며 걷는이가 나뿐이란 것도. 멋쩍해진 나는 그때야 앞을 보고 걸었다. 해변에 도착하고 보니 우리뿐이었다. 걸치고 온 비치타올을 모래 위에 깔아두고 바다로 뛰어갔다. 등 뒤로 넘실거리는 바닷물이 따스하고 부드럽다. 신나게 놀고서는 비치타월을 깔고 누워 바다를 바라본다. 선샤인비치 이름처럼 햇살이 아름답게 에매랄드 물빛 위로 부서지고 바다 전체가 하나의 보석이 된다.               

집으로 돌아와 홈스테이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혼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데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선명한 기억 중 하나이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놀이터에는 모래가 있었다. 비가 오면 빗물이 고인 웅덩이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첨벙첨벙 있는 힘껏 친구들과 물을 튕기고 깔깔거렸다. 분명 어른의 눈에는 흙탕물이었을 터인데 아이였던 우리에게는 근사한 수영장이 되어주었다. 더 더럽혀지고 물에 젖을수록 이기는 놀이였다.

물에 닿는 시원한 매끄러움이 좋았다. 물에 젖은 흙은 무엇으로도 변신할 수 있었기에 최고의 놀잇감이었다. 휘적휘적 물장구를 치다가 미끄럼을 타고 내려와 슬라이딩하다가 모래를 가지고 놀았다. 비록 집에 돌아가서 엄마의 잔소리와 꾸중을 들었지만 그때뿐이었다. 비가 내린 놀이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날의 풍경을 꺼내올 때면 맨바닥에 닿는 촉촉하고 까슬한 모래알들이 떠오른다. 맨살을 천천히 스쳐내려 가는 빗방울들의 생경함이 잡힌다.


그 기억을 끄집어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막연한 불안감이 한 꺼풀 벗기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 보는 장소, 사람들이었던 오늘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앞으로의 날이 기다려지는 처음이었다. 여행은 이토록 신비하다. 이유 없이 불안하다가도 금세 새로운 오늘이 시작된다. 떠나온 아픔이 옅어진다. 어제의 나는 잊히고 또 다른 내일을 기대하게 해준다.

겨울이었던 마음에 여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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