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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06. 2023

밤에 떠나 새벽에 도착하는 여행

정동진

겨울 바다는 특별하다. 내려간 기온만큼 파도는 어눌하고 날카롭다. 뾰족하고 쌀쌀한 소리들은 잿빛 하늘 아래 더 차갑게 부서진다. 이 냉심함은 모서리처럼 날이 서 있으며 차갑지만, 한편으로 천연한 순수함을 가진다. 어떤 것에도 다정하지 않지만 결코 어떤 것에도 자신을 꾸미지 않은, 날것 그대로 내비쳐 보이는 겨울 바다는 바다의 가장 민낯이다. 민낯이 예쁘지 않아도 좋다. 꾸밈이 필요 없는 본연의 모습만이 가지는 순수한 매력이 있다. 그 순수한 매력에 빠져 해마다 겨울 바다를 찾게 된다. 


그날도 k와 나는 겨울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창밖을 바라본다. 밤은 풍경을 집어삼킨 채, 낮의 설렘을 훔쳐 간다. 그 빈자리를 몽환적인 침묵이 대신한다. 동행들과 오가는 대화들은 어느덧 침묵 사이로 숨어들고, 꾸벅꾸벅 고개가 떨어지는 소리와 덜컹대는 기차 소리만 내달린다. 

종일 일에 지쳐 쌓여있던 노곤함은 딱딱하고 좁은 의자를 정복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이쪽저쪽 뒤척일 뿐이다. 그 사이마다 감았던 눈꺼풀이 반쯤 떠지고 창밖을 만진다. 물러나는 어둠과 찾아오는 빛이 어울려 그리는 시간의 풍경은 한 편의 꿈 같다. 반쯤 잠에 잠겨 꿈인지 현실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꿈과 현실의 중간지대쯤 일까?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노곤함이 의자에게 항복을 선언할 때쯤, 기차는 새벽역에 멈춘다.      

어떤 계획도 없이 무작정 떠나온 우리에게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다. 그저 발을 내딛고 다른 이들의 발걸음을 따른다. 12월의 바람이 차갑게 두 볼을 두들기고 잠들어 있는 바다가 다가온다. 바다 냄새가 쓸쓸하다. 겨울 바다 냄새다. 차갑고 쓸쓸한 바다 냄새가 싫지 않다. 나의 마음도 쓸쓸해서겠지.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일출에도 마음은 미지근하다. 그래도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 소망을 빌던 습관이 있었던지라, 두 손을 모아 작은 메시지를 태양에게 보낸다(우리 사업이 잘되게 해주세요). 일이 무거워 도망 온 휴가지에서도 일의 안위를 소망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워커홀릭이다. 

따뜻한 국밥으로 속을 든든히 데우고 숙소를 구한다.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아니 못하고 떠난 여행은 처음이다. 그만큼 우리를 위한 틈이 없었나 보다. 

다행히도 겨울 바다는 한가하고, 빈방은 지척에 자리한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파도 소리가 들리며 주인 할머니 인상이 따듯한 곳에 짐을 푼다. 온돌바닥도 할머니의 웃는 모습만큼 따듯하다.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 다 보니 벌써 저녁이다. 올해의 겨울 바다와 처음 밤이자 마지막 밤, 그냥 보내기 아쉽다. 두꺼운 패딩으로 몸을 돌돌 감싸고 잠들 준비를 하는 바다 곁으로 가본다. 

평일, 겨울 그리고 밤은 인적이 드물다는 뜻이다, 바다 에게는. 어둠이 내린 바다는 경계선이 흐린 대신 파도 소리가 더 매섭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걸어온 발자국이 모래 위에 새겨있다.     



그 전날 우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맨 처음 사무실에 들어갈 돈도 없어 각자의 집을 오가며 시작했던 우리가 몇 번의 이사를 거쳐 드디어 사무실다운 건물에서 사업장을 가지게 되었다. 당일 들어온 주문이 100건 넘게 있었고, 부지런히 옷을 포장하고 송장을 붙였다. 산처럼 쌓인 택배를 기사님에게 보내고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 동대문 시장이 내려다보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나와 k의 같은 꿈을 키워온 곳. 눈물 젖은 오뎅도 먹어봤고, 퀵비를 아끼려 대포 소리를 내는 이민 가방을 끌며 옷을 날랐다. 하루에 몇백 장의 사진을 찍어댄 탓에 손목이 시큰거렸다. 그래도 즐거웠다. 우리가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까. 2년간 일뿐인 삶을 지냈고 

행복하게도 꿈에 점점 가까워져 갔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가난했던 통장은 두툼해져 갔지만 그럴수록 일은 더 쌓여갔고 우리는 서로의 톱날에 자주 부딪혔다. 

기사님이 다녀가고 어질러진 사무실을 정리하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한 하늘 위에 하얀 구름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 그 아래 있는 시장만 보았지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구름이 사라져가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k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날 밤 기차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모퉁이를 발견하고자, 2년 동안 처음으로 떠난 휴가였다. 계절이 마침 겨울이었고, 바다가 생각났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볼 것도 없는, 그곳에는 겨울과 바다만 있었다.     



하늘은 불투명했으며 멀리 점으로 보이는 사람 그리고 우리 둘뿐이다. 마지막 겨울 바다와 보내는 밤을 바라본다. 순간 폐 속에서 무거운 어둠만큼 거친 함성이 터져 나온다. 잠들어 있는 바다를 깨운다. 그 소리는 바다 끝까지 달리고, 바다는 대답 대신 가만히 나의 외침을 들어준다. 토하듯 외쳐대는 함성을 바다는 차갑지만 깊은 파도로 안아준다. 처음으로 체감한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몇 마디 말보다 그저 가만히 곁에서 들어주는 것이라는 걸. 

이날 이후로 바다를 마주 보고 있으면 아스라이 매달려 있던 깊은 절벽에서 내려와 땅에 온전히 발을 딛고 있는 기분이 든다. 더는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해변에 앉아 조용히 파란 바다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북적이던 마음이 고요해지고 잠시라도 평온함을 얻게 되기에.     





20대 때 친구들과 기차 여행을 좋아했다. 특히 밤 기차 여행을. 숙소를 예약해두지 않아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 말이다. 청량리역에서 하루가 끝나갈 무렵 출발해 새벽의 한 가운데를 지나 도착한 정동진역. 친구와 졸린 눈으로 즐거운 수다를 떨다가 졸다가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차가운 새벽녘 하늘과 그 아래 회색 바다가 마주하고 있다. 인적이 드문 우리만의 바다를 실컷 바라보다가 근처에 국밥집으로 향하는 코스. 코를 훌쩍거리며 뜨끈한 국물을 넘기며 살짝 부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킥킥대며 웃는다. 이렇게 바다를 보고 속을 데우고 다시 바다를 걷다가 보면 어느새 막혔던 속은 환해지고 예전 일인 양 그 무게가 가벼워진다. 그렇게 다시 오늘로 돌아오곤 했다.      

이 여행이 낭만적일 수 있었던 것은 20대의 청춘도 있었겠지만, 밤과 새벽 사이 길게 늘어선 시간이었으리라. 그때는 오랜 시간 딱딱한 의자 위에 계속 앉아 가는 게 불편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불편함 속에 낭만이 있었다. 덜커덩거리는 일정한 진동을 느끼며 창밖에 천천히 번져가는 시간의 팔레트를 바라보는 기분, 출출한 뱃속을 달래주는 삶은 달걀과 시원한 사이다의 조화로움, 선으로 이어진 채 좋아하는 노래를 친구와 나눠 들으며 서로의 취향을 공감하는 다정한 시간.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겨울 바다를 향하던 기차 자리에 KTX가 들어섰다. 밤에 출발해 새벽에 도착했던 그 기차역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가슴속 별 하나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는 밤의 서울과 새벽의 정동진을 통과한 겨울 바다를 만날 수 없다. 천천히 다가오던 겨울 바다가, 20대의 순수한 열정이 그립고 애틋하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느린 기차역에 우리는 떠나고 겨울 바다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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