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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29. 2023

1년 살기의 여행

속초

자유의 값


유년시절을 돌이켜 보면 여러 번의 이삿날이 떠오른다. 부모님에게 이사소식을 전해 듣고 내가 할 일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다였다. 마음의 준비라고 얘기하지만 준비할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내 선택밖의 일이었고 나는 그저 따라가야 하는 여정이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지금 동네의 친구들이 좋다고 이야기한다한들 어른들의 결정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다 정해진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했다. 익숙한 동네와 친구들과의 일방적인 이별은 어린 나를 무기력하게 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또 새로운 동네가 이전의 동네 위에 덮여 버릴 테지만, 이사하고 몇 달간은 그 붕 떠있는 마음은 지속되었다. 

이사 간 방의 구조도 전 집보다 마음에 안 들고, 낯선 동네에서 새로운 친구도, 좋은 점도 하나도 찾지 못한 채 툴툴 땅을 차며 걸어 다닐 때 생각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싶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말을 혼자 낯선 길 위에 뱉어내곤 했다.


어른이 되면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선택의 자유를 획득하는 독립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월세도 많이 나가고 생활비에 이것저것 다 더하면 본가에서 살아가는 게 비겁하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다. 자유는 어른이 된다고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 그만큼의 값을 지불하거나 아니면 그만큼의 가치를 포기하고 난 후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d가 11년간 다니던 첫 직장을 퇴사했다. 그의 직장이 가까운 경기도에 살고 있었고 우리에게 6개월 된 아기가 있었다. 매일 이어지는 야근과 주말 출근까지 겹치면서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은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더 낙담했던 것은 이 시간의 패턴이 영원할 것 같은 절망이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오늘의 무게가 우리를 짓눌러갔다. 마치 삶이 나에게 두 개로 갈라지는 길 위로 밀어 넣는 것 같았다. 야근과 결별하는 삶 그리고 영원히 야근과 함께하는 삶. 몇 달의 고민 끝에 우리는 야근이 없는 삶의 길을 선택했다. 퇴사를 하고 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그가 직장을 더 나가지 않는 첫날이었다.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모습, 평화롭기까지 한 평일 거리의 모습에 우리 둘은 마주 보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11년간 몸을 담고 있던 직장에 출근하지 않는 첫날의 소감을 물었다. 

"퇴사한 기분이 어때?"

"노예에서 풀려난 기분이야"

운전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벗어난 것에서 얻은 해방감이 그의 어깨를 그리고 나의 두볼을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승진과 높은 연봉을 내려놓고 자유를 얻었다. 당장 어떤 미래도 그려놓지 않았지만, 갑갑하게 조여오던 숨이 비로소 편하게 쉬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거지를 결정지었던 직장이 사라지자 새로운 길 위에 다양한 문들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아가는 여행과 여행하는 삶


다니는 직장이 없어지자, 더 이상 수도권에 살아야 할 목적이 사라졌다. 물론 나의 가족, 친구들이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절대적 배경은 되지 않았다. 하나의 퇴사라는 새로운 문을 열자, 또 다른 새로운 문이 눈에 들어왔다. 평생을 살아온 도시 안의 프레임이 아닌, 도시 바깥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한참 시간에 굶주렸던 터라, 호주에서의 느린 시간이 무척 간절한 상태였다. 선샤인비치의 한적하고 넉넉한 하루하루가 떠올랐다. 한국에는 그런 곳이 없을까? 아름답고 느긋한 바닷가 마을, 작고 조용한 반짝이는 여행지를 찾게 되었다. 회귀본능이었다. 과거의 기억 속으로 추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그 장면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그리움 말이다. 

그런 심리적 갈망을 안고 여행을 떠나서인지, 그곳이 원래부터 그 모습으로 존재해서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자주 여행지로 다녀왔던 속초에서 기시감이 일었다. 바다와 산, 호수가 지척에 있고 이 모두를 감싸고 있는 하늘에서 누사의 낮고 푸른 하늘이 겹쳐 보였다. 공기 중으로 태양의 입자들이 만져질 것 같은 계절이면 해마다 돌아가고 싶은 여행의 충동을 일으키곤 했으니까. 꽤 오래도록 마음속 여행의 고향이었던 셈이다. 

삶에서 처음 마주한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선택을 한다면, 그곳이어야 했다. 그곳이 되지 못한다면 결이 닮은 곳이어야 했다. 그래야 나의 마음은, 마음속 여행은 잃어버린 고향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이기에. 

선택은 또 다른 새로운 선택으로 이어지고, 여행은 또 다른 새로운 여행으로 향한다. 유년시절의 상실감은 자유를 갈망하게 했고, 20대 때 여행지에서 추억은 30대의 나에게 새로운 여행지를 열어주었다. 

단 한 번의 여행일지라도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뮤즈가 될 수 있는 것도 여행이다. 내 여행의 뮤즈는 나와 우리 가족을 바닷가 마을에서 삶을 열어주었다.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겁이 났다. 1년 살기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니 겁이 달아났다. 선샤인비치가 그랬던 것처럼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바닷가가 있고 오트밀색 모래사장이 있고 낮아서 손에 잡힐 것 같은 파란 하늘이 있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오랜 여행의 짐을 풀었다. 

1년 살기 여행은 이름 그대로 살기의 여행이 될 수도 있고 횟수가 쌓여가면서 여행하는 살기가 될 수도 있다. 살아가는 여행과 여행하는 삶. 이 두 가지 구문의 차이가 궁금했다. 이곳에서 1년 살기 여행을 이어온 지 횟수로 5년 차가 되어가지만 아직도 답을 알지 못한다. 그저 더 시간을 뒤로 보내보는 수밖에. 하나 확실한 것은 창밖의 바다를 좋아하는 것이고 더 확실한 것은 그만큼 삶도 여행도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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