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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Jan 03. 2024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미국


독서는 여행과 닮아있다. 여행에 여행지가 있다면 독서에는 책 속의 배경이 있다. 그 배경은 바로 작가가 그려놓은 세계이다. 캐리어에 짐을 가득 싣고 얼마의 시간을 소비해 여행지에 다다르는 대신, 책 여행은 책 한 권과 편히 앉을자리 한켠만 있으면 언제든 어디서 곤 바로 떠날 수 있다. 동행자 대신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조우해 한 페이지, 한 걸음마다 여정을 이어간다. 책 속의 문장들은 하나하나가 작가를 통과해 나온 유산이기에 우리는 어느덧 이 여행에서 작가의 세계관에, 상상 속에 푹 빠져들게 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책 속의 이야기는 영원히 처음 만난 모습 그대로이다. 이 여행지를 계속해서 우리가 찾아만 준다면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영속성을 지니며 우리의 곁을 지키게 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함께 자라나지만 , 책 속의 인물들과 서사는 불변의 존재들로 언제고 서재 한켠에서 반짝이고 있다.


소파에 앉아 바로 옆 책장 속 장서들을 바라본다. 느긋하게 뒹굴뒹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즐겨 읽는 책 <작은 아씨들>의 빨간 벽돌 책이 눈에 띈다. 조가 자신만의 피난처인 창문 옆, 세 발 달린 낡은 소파에 앉아 사과를 입에 물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긴 채 <레드클리프의 상속인>을 읽듯이.

나도 소파에 기대어 얇은 담요를 덮고 <작은 아씨들>을 펼친다. 잘 씻은 빨간 햇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책장을 넘긴다. 200여 년 전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맨 첫 만남은 언제 읽어도 정겹다. 


"선물도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야." 

자매들의 복작거리는 크리스마스 풍경을 읽고 있는 순간이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기분이다. 맨 처음 <작은 아씨들>을 읽었던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함께 자란 메그, 조, 베스, 에이미. 네 자매의 이야기는 언제든 나를 소녀의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해 준다. 여행 속의 여행이 펼쳐진다. 칼질이 서툴러 껍질째 통째로 먹었던 사과도 함께. 


기억 속 크리스마스 선물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산타할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의 허망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으로 세상의 민낯을 직접적으로 접했던 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던 때가 가장 행복한 유년시절로 기억된다. 그 이유는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알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8살의 나는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1년 동안 착한 아이에게 한 명 한 명 다녀가시면서 전해지는 크리스마스의 선물이 부모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산타 할아버지와 눈의 나라에 대한 동심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작은 아씨들의 크리스마스날에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전쟁에 나간 아버지를 대신해 어깨가 무거워진 엄마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엄마는 딸들에게 마음의 언어가 담긴 책을 선물한다. 다 함께 모여 이제 막 크리스마스 아침 식사를 하려 하는데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이웃의 소식에 자매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음식들을 내어준다. 직접 찾아가서 나눔의 기쁨을 누린 이들은 도시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날을 누리게 된다. 

크리스마스날 산타할아버지가 비록 없더라도 누군가를 생각하는 따스한 나눔이야말로 가장 특별한 이날의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끼던 시점이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없는 크리스마스가 더 이상 밉지 않게 되었다. 이 장면들로 여행을 떠날 때면 마음속으로 매번 따스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찾아온다.



“내 유년기가 끝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조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의 유년기도 끝나고 있었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평생 언니와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좋아하는 초코빵을 눈앞에서 빼앗긴 것처럼 무력감이 컸다. 나는 유년시절이 끝나기를 바랐으면서도 바라지 않았다. 독립을 해서 자유롭게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생경함이 두려웠다.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만큼 책임 또한 가벼웠고, 울타리 바깥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는 만큼 짊어야 할 무게도 무거웠기에. 나는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사이에 오도 가도 못하고 끼어 있었다.

틈에 끼어 하루가 버겁게 느껴지던 십 대의 나에게 조는 검은색 양모 앞치마와 발랄한 빨간색 리본으로 장식한 같은 재질의 모자를 쥐어주었다. 그가 전해준 쓰기의 작업복을 입고서 종이 위에 시를 쓰고 글을 썼다. 그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벗어나 하얀 세상 위에서 꿈을 꿀 수 있었다.  자유로워지는 꿈, 내가 원하는 오늘의 모습으로 살아지는 꿈, 눈물이 아니라 웃음으로 채울 수 있는 꿈을. 



“난 아라비아 말들로 가득 찬 마구간 하고 책들이 가득 쌓인 방하고, 

그걸로 글을 쓰면 로리의 음악처럼 금세 유명해지는 요술 잉크병을 갖고 싶어. 

......난 책을 써서 돈도 벌고 유명해지고도 싶어. 이게 내가 제일 이루고 싶은 꿈이야”  

 

혼자서 글을 쓸수록 조의 요술 잉크병이 갖고 싶어졌다. 그처럼 글을 쓰는 직업을 마음에 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국어학원을 다녔다. 논술을 배웠고, 매주마다 쓰기 과제가 주어졌다. 처음으로 장문의 논리적인 글을 쓰는 경험이었다. 다음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거 네가 쓴 거 맞아? 네가 직접 쓴 거 맞아? 진짜 네가 쓴 거야? 어디서 베낀 거 아니야? 어느 책에서 보고 쓴 거니?" 

대여섯 번을 물었고, 나는 한결같은 대답을 했다. '네, 제가 쓴 거 맞아요.' 

마지못한다는 듯 그는 내가 쓴 글을 복사해서 학생들 모두에게 나눠주고 그 글을 가지고 수업을 이어갔다. 그 후에도 매주마다 과제가 있었고 그는 매번 나의 글을 복사해서 나눠주었다. 더 이상 나에게 내가 썼냐고 묻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날 질문을 하던 그의 의심 가득한 눈빛과 말투가 나에게 쓰기의 부정 감정을 심어주었다. 그 후에도 학교에서 다이어리에 내가 쓴 시를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친구들은 내가 썼다는 걸 믿어주지 않았다. 분명 내가 쓴 글들인데 나와 다른 세계에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만약 나에게 부정보다 긍정의 말과 눈빛을 전해주는 선생님을 만났다면, 그런 친구를 만났다면 내가 쓰기의 길로 더 빨리 걷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대답 끝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상만큼 씁쓸한 것이 없다는 현실만 자각하게 된다. 



  “새로운 걸 접해 보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많은 걸 보고, 경험하고, 배우고 싶어 미치겠어요. 지금은 눈앞의 사소한 일들에 매달려 지나치게 안달하는 것 같아요. 정신이 번쩍 드는 자극이 필요해요. 그래서 올겨울에는 둥지 밖으로 살짝 나가 날개짓을 해보려고요.”     

쓰기의 길은 대학생이 되어 점점 잊혀갔다. 어른이 되었고 조가 어른이 된 것처럼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자유를 얻은 만큼 짊어진 무게도 늘었지만, 내가 나의 길을 선택하고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고취되었다. 원하는 꿈을 향해 매진하고 다양한 일들을 해보았다. 어느덧 작은 아씨들처럼 사랑스러운 딸의 엄마가 되어서야 잊고 지냈던 요술 잉크병이 떠올랐다. 조가 둥지를 벗어나 뉴욕으로 떠나던 날. 뉴욕에서 글쓰기에 계속 도전하며 꿈에 다가가던 나날들. 처음으로 그의 글이 신문에 실리던 날. 처음으로 글이 가치를 인정받아 돈을 벌어들였을 때 함께 마음을 다해 응원하던 소녀의 내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글을 쓸 때 조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두 볼이 발그레 생기가 돋아나는 쓰기의 설렘이 다시 잡히기 시작했다. 


두 아이들을 재우고 9시부터 지금까지 이 글을 쓰고 있다. 12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 오늘의 이 여행을 마치려 한다. 이 글을 빌어 나와 지금까지 오랜 세월 함께 이 여행을 떠나 준 동행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부치려 한다. 가장 좋아했던 조에게.




Dear. 조.

안녕하세요. 저는 주하예요. 언니는 제 이름이 생소할 수 있어요. 저는 언니가 살던 시대보다 200여 년 뒤에 살고 있거든요. 저는 <작은 아씨들> 속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메그, 조, 베스, 에이미' 네 자매들 간의 티격태격하지만 우애가 깊은 모습을 볼 때마다, 언니와 함께 한 이불에서 함께 자며 티격태격했지만 알콩달콩 했던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에 행복했답니다. 덕분에 저의 유년시절에 즐거운 기억들을 심어둘 수 있었답니다. 오랜 시간 저와 함께 이 여행을 이어가 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서야 이제 조언니가 건네주었던 쓰기의 작업복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어요. 이제 더는 요술잉크병을 찾지 않아요. 매일 쓰는 것이야말로 쓰기의 마법을 건넨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어느덧 저의 곁에 작은 아씨들처럼 사랑스러운 두 딸들이 있어요. 두 자매가 자라고 둘 다 책을 읽게 되거든 셋이 함께 이 여행을 떠나보려 해요. 마치 부인이 언니들에게 전했던 말을 해주면서요.


"아, 내 딸들아, 너희가 앞으로 얼마를 살든 지금처럼만 행복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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