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세드 May 05. 2023

마음을 쏟으면 취향이 되고…

끝까지 좋아하는 마음

넌, 늘 춘향 같은 마음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중에서 -




2010년 11월 즈음 친한 동생이 일하는 카페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더랬다. 그 당시 신랑도 카페 오픈을 준비하고 있어 눈코뜰 새 없이 바빴고 아이는 16개월이 되었고 초겨울이었고 나는… 외로웠다. 신랑이랑 오순도순 앉아 이야기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아이는 여전히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늘어가는 떼와 강력한 자기주장에 난 자주 화가 나있었고 반성과 자책 후회와 눈물이 뒤섞이던 나날을 보냈다. 그 당시 친한 동생이 일하던 카페는 내게 쉼이 되어주었던 공간이었다. 3천5백 원이면 몇 잔이든 리필이 가능했던 커피, 서가에 꽂혀 있던 책. 유모차에서 아이가 잠이라도 자 준다면 그곳은 내게 천국 그 자체였던 곳이었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카페 서가를 어슬렁 거리다 조금 특이한? 제목을 보고 빼 든 책을 슬쩍 보더니 동생이 말했다.


“언니, 그거 읽어 봐 진짜 재밌어!”

“무슨 내용인데?”

“연애 소설. 근데 진짜 재밌어! 꼭 읽어 봐!“



그날 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아이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겨우겨우 잠을 재웠다. 아이가 잠들기 전에 내가 잠들면 안 되겠기에 (빌려온 책을 읽어야 하고, 자정쯤 집에 올 신랑을 기다렸다 저녁도 차려줘야 하고..) 피곤한 몸으로 인해 자꾸 내려오는 쇳덩이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치켜뜨며 버티고 버텼다. 드디어 아이는 꿈나라로 가셨다. 야호!!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과 몸을 클렌징 폼과 샤워 워시로 깨끗하게 씻어내고 개운하고 말간 얼굴로 나와 커피 한 잔을 내렸다. 10시! 신랑이 오기 전까지 약 2시간이 남은 상황.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읽어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정신없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심하고 낯가림이 심한 라디오 작가 ‘공진솔’과 라디오 방송국 피디인 ‘이건’의 첫 만남 그리고 핑퐁 하듯 주고받는 말들 사이사이에 난 혼자 피식피식 큭큭큭을 반복하며 책에 홀린 듯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아니지, 책 자체가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였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작업 거는 게 뻔히 보이는 이건과 자신의 감정에 점점 확신을 가지는 공진솔. 아슬아슬 콩닥콩닥한 썸을 타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공진솔 앞에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호랭이 깨물어 갈 소리를 하는 이건. 그런데 왜 나는 그 모습에 심장이 멈추는지.. 둘의 키스 장면에서 왜 내 심장은 빠르게 뛰는지, 진솔이 우는 장면에서는 왜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퇴근한 신랑 밥 차려주고 정리하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해서 완독하고 덮은 시간은 새벽 2시. 책을 읽는 동안 각성이 돼서 그런지 바로 잠이 오지 않았다.



’ 잠도 안 오는데 한 번 더 읽어 봐?‘



내용은 솔직히 별 거 없다. 직장에서 만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썸을 탄다. 누가 봐도 남자가 이 여자를 사랑하는데 정작 본인은 모른다. 여자가 먼저 사랑을 고백했더니 남자는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며 마음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그 남자에게는 십 년간 짝사랑을 해 온 한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십 년 간 짝사랑한 여자는 남자 주인공의 절친과 연인 사이다. 얽히고설킨 관계 그 가운데 생겨버린 갈등, 주인공 남녀의 이별과 재회.



굉장히 뻔한 스토리임에도 난 그 이야기에 홀딱 빠져버렸다. 한 달 내내 그 책을 붙잡고 살았다. 결국 내돈내산을 했고 짬이 날 때마다 펼쳐보고 혼자 큭큭 웃고 눈물짓고 생쇼를 다 했다. 심심하면 심심해서, 외로우면 외로워서 화가 나면 화가 나서 기분이 좋으면 기분이 좋아서.. 별별 이유를 갖다 붙이고 그 책을 읽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마흔 번쯤 읽어왔다. 누군가는 물어본다. 왜 그 책이 좋으냐고, 어느 포인트가 그렇게 좋았냐고, 그렇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닌 거 같다고…. 그치. 그럴 수 있지. 그런 책이 아닐 수 있다.




신랑과 나는 한 교회에서 만났다. 내가 그를 만난 건 스물일곱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삐쩍 마르고 전봇대처럼 키만 큰 남자. 조금은 시니컬해 보이고 까칠해 보이는 표정에 ‘난 저 사람 별로일세’를 속으로만 외쳤다. 그런 그와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시니컬해 보이는 표정 뒤에 감춰진 다정함, 스쳐 지나가듯 말한 작은 것도 기억해 주고 챙겨주는 모습에 나 좀 감동을 받았었나 보다.  ‘어라? 이 사람에게 이런 다정한 면이 있어?’  난 왜 그 순간 심장이 두근댔던가!

네 감정도 내 감정도 확실하지 않은데 우린 왜 자꾸 이렇게 연락을 하는 거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우린 왜 문자를 한 달에 천 건씩 보내는 거지?

왜 자꾸 만나고 싶고 안부를 물어보고 싶어지는 거지? 왜 자꾸 밥 먹자고 커피 마시자고 연락을 하는 거지 이 오빠?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읽는 시간은 내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한 남자로 인해 심장병이 난 것처럼 심장이 두근대던, 살짝 보여주던 미소, 우리만이 아는 농담 속에 미친 듯 설레어하던 이십 대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카페 준비를 하느라 피곤에 절어 잠만 자고 싶어 하던 신랑은 사라지고 늦은 시간까지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던,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주던 썸 타던 그 오빠가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그리웠던 거다. 나만을 바라봐주고 사랑해 주던 한 남자. 그 사랑받아먹고 무럭무럭 크고 있던 내가 다시 되고픈 거였다.

긴 다리 쭉쭉 뻗으며 걷는 그곳을 런웨이로 만들었던, 내 인생에 소량이지만 꼭 필요한 비타민 같은 존재였던 한 남자를 만난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거 한 가지라도 해 주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굴렸던 그 남자가 아직도 거기에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나 홀로 상경하여 살았던 진솔은 서울에 정이 붙을 때까지 서울을 걷고 또 걷는다. 종로 5가, 4가, 3가, 종각 그리고 큰 칼 옆에 찬 이순신 동상이 서 있는 광화문까지. 걷느라 아픈 다리는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시집을 읽으며 쉬어줬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난 진솔과 다르게 내가 맘에 들지 않거나 마음이 우울한 날이면 어김없이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왔다. 광화문을 지나 종각, 종로 1가를 시작으로 5가, 더 간다면 동대문까지.. 갔던 길 되돌아 다시 광화문으로 오면 나도 교보문고에 들어가 왕왕거리고 욱신욱신 쑤시는 다리를 위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책을 읽으면 익숙한 그 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인사동 전통 찻집도, 인사동 길거리 난전에서 사고팔던 조악하지만 정감 가는 물건들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난 진솔이었다. 그러니 이 책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시절에 책을 읽느냐에 따라, 그 책이 불러오는 기억과 감정에 따라 책을 대하는 온도가 참 다르구나 싶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이 2010년,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지금도 난 여전히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 그 시절의 나와 전남친을 만나고 오면 퇴근하고 돌아온 현남편이 사랑스러워보임은 당연한 일이다. 당신이 날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하고,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그 무게로 오늘도 이렇게 애썼구나 싶어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십 대에 만나 이제는 흰머리가 생긴 한 남자, 날렵하던 몸매는 사라지고 뱃살이 늘어가는 한 남자, 긴장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편안한 몸과 맘으로 내 옆에서 쉬고 있는 한 남자를 본다.



이젠 광화문이 아닌 내가 사는 일산을 걷고 또 걷는다. 동네 뒷산을 걷기도 하고 일산 신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88m) 정발산에 오르기 위해 부러 집을 나서기도 한다. 총 3,34km에 달하는 둘레길을 둘레둘레 거닐기도 한다. 아픈 다리 쉬어주기 위해 이제는 카페에 들어가 좋아하는 커피와 달달한 디저트를 시켜놓고 책을 펼쳐든다. 돈 없던 20대의 내가 교보문고 바닥에서 쉼을 누렸다면, 40대 중년인 난 카페에 앉아 호사를 누린다. 20년이란 시간 동안 쌓아온 ‘양떼같이’ 많은 추억들. 그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내먹는 기분으로 이제는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꺼내든다. 풋풋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던 오빠도 만나고, 어려운 마음 가눌 수 없어 다리에게 못할 짓 많이 했던 나를 만나고 온다. 그 훈장으로 종아리에 타조알이 떡 하니 박혀있다.




하나에 빠지면 앞뒤 안 보고 달려가는 나란 사람.

그것은 책이 되었든 음식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내게서 나오는 반응은 똑같다. 질리고 물릴 때까지 먹고 읽고 빠져들기. 여전히 나의 최애 음식은 떡볶이, 최애 가수는 성시경, 최애 배우는 톰 크루즈, 가장 아끼는 책은 사서함이다. 죽을 때까지 최애는 내 옆에 있는 두 남자일 것이다. 마음을 쏟으면 취향이 생기고 그 취향은 또 나를 만든다. 나를 만들어 온 것들에게 애틋함을 갖는 것은 당연할 터.

‘그게 왜 좋아?’라고 묻는 질문에 ‘그냥 좋아’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길고도 긴 사연들이 존재한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도 단단해지는 중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