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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크 Oct 26. 2020

한다면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이어트의 Why

          모든 것은 하나의 농담에서 시작되었다.


          우연한 계기, 너무 우연해서 사실 정작 그 때는 ‘계기’라고 이름 붙이지도 못한 상태였던, 그 우연한 한 순간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 있는가?

          지나고 보면  자기 입맛에 맞게 편집되는, 인간의 왜곡된 기억을 일컫는 전문적인 용어가 있다. 사후 확신 편향(Hindsight bias). 영어단어 hindsight 뒤를 본다는 뜻인데,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판단할   일이 어진 뒤에 이해하게 되는 능력을 의미한다. 미리 예측하는 선견지명이 아닌, 나중에 이해의 틀을 끼워 맞추는 후견지명이다. 쉽게 말해 이런 거다. ‘ 그럴  알았지.’

          ‘내 그럴 줄 알았지’는 문장 자체로는 중립적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긍정 혹은 부정의 뉘앙스로 느껴질 때가 많다. 입 속에서 한 번 되뇌어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느껴보라. “내 그럴 줄 알았어!” 난 항상 일이 잘 풀린다니까. 내가 너를 좀 알잖아! 혹은,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뭐 항상 그렇지 뭐. 누가 나를 믿어주기나 하겠어……


          후견지명의 폐해를 여러 모양으로 경험하고 나면, 남들이 “야,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같은 말을 하면 알레르기 수준으로 그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에게는 종종 되뇌이게 되는 말이 바로, ‘내 그럴 줄 알았다.’ 이다. 내가 그 때 왜 그런 농담을 해가지고…… 정말 진심 1도 없는 농담일 뿐이었는데. 그 농담이 튀어나간 이유도 순전히 할 말이 없어서 그랬던건데. 사실 모든 것은, 정말로, 하나의 농담에서 시작되었다.


          때는 TRX로 그룹PT를 하는 짐에 처음으로 간 날이었다. “운동 경험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운동복, 운동화, 수건1장 준비해주세요.” 정도의 문자를 주고받은 후 샘플 체험을 하기로 했다. 운동화도 운동복도 죄다 마라톤 하던 것들 뿐이어서, 아무래도 달리기에나 적당해 보이는 차림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헉헉헉. 유산소와는 전혀 다른 거구나. 무거운 무게를 드는 힘만 부족한 게 아니라 몸의 밸런스도 매우 불균형 하다는 걸 처절하게 깨달은 샘플 체험 후, 상담을 받았다. 앞에 서면 항상 작아지는, 인바디 결과를 손에 들고 짐장님께서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섭취요령과 함께 근육의 균형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상담 끝. 주섬주섬 집에 갈 채비를 하는 내게 짐장님이 덧붙이듯 질문하셨다.


          “근데, 운동하시는 목적은 뭐에요?”


          와, 예상 못했다. 목적을 질문하실 줄은 몰랐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아, 사실 이십 대 초반에 유도 배우는 데 실패한 이후 웨이트 운동 완전 싫어하구요. 마라톤 좋아하는데 오래 뛰다보니 등이랑 배에 근육이 있어야 기록이 더 좋아진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 얘기 들은 건 사실 몇 년 전인데, 이제야 굳이 짐을 찾아온 이유는, 음, 글쎄요. 저도 많이 생각해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아, 얼마 전에 영화 <EXIT>를 봤는데 거기서 조정석이 케틀벨에 줄 묶어서 던지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거 꽤 무거워 보이던데…… 그 정도 던질 수 있으려면 얼마나 운동을 해야 될까요?”

          음, 아무래도 미친 놈처럼 보일 것 같다. 너무 정확한 진실은 관계에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난 예의 바르고 사회성이 뛰어난 사람이니까, 짐장님의 저 질문에 깔끔하고 쿨하며 이상하지 않게 한 문장 정도로 딱 대답해야지. 하 와 유? 하고 물어보면 파인, 땡큐, 앤쥬? 하면 되는거니까. 그렇게 사려 깊은 고민 끝에 튀어나간 대답이 바로,


          “식스팩이요.”


          짐장님의 표정을 난 분명 봤다. 당황스러움과 어이없음과 웃겨죽겠음이 이지러짐 없는 원모양으로 1:1:1의 비율로 섞여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 표정으로 해주신 대답이 또 아주 멋졌다.

          “아, 식스팩, 네. 식스팩. 음.”

          역시 또렷이 기억하는데, 짐장님은 식스팩을 두 번 되뇌이셨다. 그 뒤로 흐르는 5초간의 정적은 꽤나 길게 느껴졌다.


          그 뒤로 그 날의 파인, 땡큐, 앤쥬? 같은 대답을 여러 번 생각해봐도, 내가 진짜 식스팩 같은 걸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무의식 속에 오랫동안 봉인해온,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간절한 소망 같은 게 있어서, 그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어, 맞어, 난 사실 식스팩을 가지고 싶었던 거였는데! 하며 눈물을 줄줄 흘린다거나, 그래, 이제 난 내 진심을 알았어! 하며 헛둘헛둘 식스팩을 향해 훈련하는 모습 뒤로 강렬한 락 비트의 BGM이 흐르는 드라마 같은 일 따윈, 없었다. 오히려 그 뒤로 운동하러 갈 때마다 짐장님이 설마 그 대답을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저 식스팩 만든다는 놈 하면서 말야, 하는 마음에 혼자 부끄러워하는 정도였다. 뭐 물론, 짐장님은 신경도 안 쓰셨겠지만.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도전을 받았다고 하기엔, 주변에 식스팩 있는 사람도 없다. 물론 있다 해도 그걸 나한테 말해줄 이유도 없으니, 있어도 모를 일이다. 식스팩이 새삼스레 유행인 것도 아니고, 정말 그 날의 저 발언은 아무리 생각해도, 근원을 알 수 없는 정말 그냥 단순히, 농담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4개월쯤 지나 복근이 약간 드러나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이거 진짜, 못할 일은 아니겠는데? 와이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식스팩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정작 튀어나간 말이 가관이다. “식스팩, 해야 될 것 같아.” 와이프의 표정을 또렷이 기억한다. ‘자다가 봉창 뚜드린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구나’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났다. 내가 처음 마라톤을 완주했던 이유가 그랬고, 처음으로 3시간대 기록을 세웠던 때가 그랬고,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명선언서를 쓸 때가 그랬던 것을. 뭔지 모르지만 어떤 이유로든 시작을 해버렸으니 하나의 매듭은 짓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거길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되겠다는,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겠다는 다짐이었다는 것을. 그게 상황을 달리해서 웨이트라는 운동에서 반복되는 것일 뿐,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바로 ‘한다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깊숙이 묻혀 있어서 나도 잘 몰랐던 나의 원의(原意)를 알게 된 계기는, 정말, 순전히, 우연에 우연을 곱한 농담에서 시작되었다. 잘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해야 할 때가 있다. 말 같지 않아 막걸리 같은 말이라도, 던져봐야 할 때가 삶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자신을 잘 알고 웬만하면 말 실수 같은 건 하지 않는 현명한 사람도 있지만, 아무 말이나 던져보고는 몇 개월을 이불킥을 한 후에야 겨우 진심을 알아채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남을 도우며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농담을 던져놓고는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달려나가는 사람 하나쯤은, 있어도 무해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오늘도 여전히 굳건하게 소중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내가 나에게 묻는 것처럼, 당신도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끄럽지만 가끔은 술기운을 빌려 내 주위 소중한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 난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넌 어때? 같은 말을 당신도 주위 소중한 사람들에게 해볼 수 있으면 멋질 것 같다. 농담같이 시작하더라도 그게 당신의 삶에 굳건한 진담으로 자리잡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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