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힌 감정은 숙성되는 게 아니라 터진다
감정은 묵은지가 아니다. 오래 숙성할수록 깊은 맛을 내는 묵은지와 달리 누군가를 향해 켜켜이 쌓인 감정은 원망이 되고 비난의 화살이 된다. 털어내면 잠깐의 섭섭함으로 끝날 수 있지만 직접 대면할 용기가 부족해 선택한 대안이 그냥 넘기는 인내라면 그 인내의 뒤끝은 우리의 무의식에 얇은 층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나씩 쌓인 층이 두 겹이 되고, 세 겹이 되어 점점 부피를 더하다 결국 의식의 언저리를 뚫고 나온다. 시작은 사소하게 넘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식을 뚫고 나온 뒤끝 있는 무의식 속 인내는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증폭시킨다. 켜켜이 쌓인 당신의 인내의 시간을 알지 못하는 상대는 오히려 본인이 피해자다. 당신의 화의 근원은 쌓인 시간만큼의 서사를 더한 합이지만 당신의 감정을 받는 상대는 쌓인 시간만큼의 서사가 완벽히 제외된 현재다.
"아니, 이게 그 정도로 화 낼 일이야? 지금 어이없는 건 오히려 나야"
"내가 지금 이거 하나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해? 난 지금 이 건만 가지고 화가 난 게 아니야"
“그럼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난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에 대한 책임까지 몰아서 지라는 거야?"
지금까지의 총합으로 계산된 당신의 분노는 납득할 만 하지만 감정을 묵혀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한 책임의 지분에는 당신의 몫도 있다. 과거 특정 시점으로부터 차곡히 쌓인 당신 감정이 현재 분노의 총합이라는 논리는 조금은 억지다.
인내할만한 일이라면 쿨하게 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마음은 쿨한 사람이고 싶으나 여전히 감정의 찝찝함이 미진하게 남아 속마음까지 쿨내를 풍기지 못하겠다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진정한 쿨함을 선택할 건지 아니면 솔직하게 상대방과 말로 풀어 마음에 불편하게 남은 앙금을 털어낼 건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웬만한 걸 대범하게 넘기는 쿨함이 이미 성향 자체에 장착되어 있어야 한다. 타고나길 소심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게 노력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냥 쿨하게 넘기자'라고 다짐하지만 마음속 앙금은 수시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노력하는 쿨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성향이 정말 그쪽으로 변했다면 모를까...
그렇다면 남은 건 후자다. 지나치게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묵혀둔 감정이 한 번에 폭발한다면 그동안의 당신의 배려와 인내는 안 하느니 보다도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과정의 서사는 완벽히 생략되고 당신의 감정 폭발이라는 결과만 남는다. 부정적 감정을 실지 않고 전달할 수 있을 때가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한두 번 말할 용기를 내다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돌이켜 보면 난 젊은 시절 담아두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그러다 아주 가끔 그 정도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설 때 크게 폭발하곤 했다. 감정의 폭발로 나에게 돌아오는 마이너스가 얼마나 큰지 삶에서 깨달았고 어느 순간부터 더 불편한 감정이 되기 전 상대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변화는 이루어졌고 그런 시간이 쌓이다 보니 할 말을 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사라졌다.
좋게 얘기를 전달했는데도 상대방이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면 당신 인생에 계속 둘 건지 아닌지만 선택하면 된다. 중요한 건 당신이 상대에게 좋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거다. 그런 단계 없이 쌓인 감정을 폭발시켜 상대와 끝을 본 거라면 찝찝함은 당신의 몫이지만 중간에 좋게 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적반하장으로 나온 거라면 마지막의 책임은 상대의 몫이다. 하지만 경험상 좋게 전달했는데 격하게 반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이상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참에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묵힌 감정을 터트려 기어이 끝을 볼 건지 아니면 그러기 전에 상대에게 전달해 말로 풀 건지 선택해야 한다. 얘기하지 않으면 의외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라는 건 당신의 관점이다.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기에 모든 사람이 당신과 같은 정도로 남의 감정을 헤아리진 않는다. 쌓여가는 당신의 인내와 배려가 결코 당연한 게 아님을 상대에게 보여 주는 용기가 때로는 필요하다.
관계는 끝이 중요하다. 똑같이 끝내는 상황이 되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남은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찝찝함이나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면 오히려 상대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난 분명히 좋게 얘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난 이 관계에 별 미련이 남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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