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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an 28. 2020

춤추는 병동-마음을 담고 있는 몸

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아프지 않기를...

          

‘나는 춤을 추고 싶었다. 내 생각과 느낌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단어들이 아닌 내 몸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Won’t you join the dance?』 _Trudi Schoop)     


나와 함께 사는 꼬마는 기분이 좋을 때면 양 손을 옆으로 펼쳐 좌우로 흔들며 다리를 옆으로 옆으로 꽃게처럼 걸어 다닌다. 받고 싶은 선물이라도 있는 날이면 두 손을 한쪽 얼굴에 붙이고 온 몸을 배배 꼬며 더없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던 아이가 슬퍼지면 침대로 가 꼼짝도 하지 않고 엎드려 있는다. 우리 집 꼬마는 자기의 감정을 온몸으로 이야기한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몸으로 말하는 것에 인색해지기 시작했다. 점잖은 사람은 몸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교육 때문인지 우리는 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기 시작했고  몸이 하는 말에 점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이 조금씩 병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파서 몸이 병든 사람,  몸의 이상신호를 미처 읽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은 사람, 어찌 되었건 현대는 마음이 아픈 사람이 너무도 많다. 사람들은 점점 더 다양해지는 마음의 공격에 면역력을 잃어 간다. 개인주의, 소통의 부재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마음 약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남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신가요? 뭘 가르치러 오셨나요?”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다가온 환자는 벌써 몇 개월째 매주 한 번씩 댄스테라피를 경험하는 환자이다. 처음엔 매주 보면서도 매번 몰라보는 그녀가 내심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래도 볼 때마다 궁금해하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미소를 보일 수 있는 환자는 그래도 마음이 좋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얼굴에 표정이 없다. 시선이 고정되어 있기도 하고 걸음걸이에 무게감이 전혀 없기도 하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가 하면 무작정 치료사를 의지하고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려고 하기도 한다. 완전히 왜곡된 신체상을 가지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걷는가 하면 공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기도 하다.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정겹게 얘기하는가 하다가 이내 싸움을 하기도 한다. 

폐쇄병동에 가면 이런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다양한 히스토리를 가지고 저마다의 병명을 진단받아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처음 환자들을 만날 때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고 자신의 기분을 나누고 조금씩 몸을 움직이면서 이내 긴장된 마음이 풀어진다. 리듬에 맞추어 그들과 함께 춤추다 보면 이들도 그저 한 사람이라는 것,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동생,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되고 누구보다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춤. 춤이 가진 놀라운 영향력은 병동에서도 그 에너지를 발한다. 

춤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아이처럼 순수하게 만들어 주고 그 앞에 환자도 예외는 아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하고 한 사람씩 둘러앉아 자기의 기분을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다양한 움직임들을 서로 미러링 해주는가 하면 평소 인사 한번 하지 않았던 병동의 환우들과 몸으로 인사를 한다. 움직임이 잘 나오지 않을 때는 치료사의 움직임을 다양하게 따라 해 보기도 한다. 평소대로 걷기도 하고 짝꿍의 걸음걸이를 따라 해보기도 한다. 자신을 똑같이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며 평소 자기 모습이 어땠는지도 보게 된다. 자기 안에만 갇혀 있던 시선이 드디어 밖을 향하게 되면서 사회적 자기의 모습을 경험한다. 한정되어 있는 움직임들이 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다양하게 확장된다. 무게감 없이 걷던 걸음걸이에 온갖 감정을 담아 쿵쾅쿵쾅 걷기도 하고 걸음걸이에 자기만의 소리를 더하기도 한다. 힘이 없는 팔놀림을 공간을 휙휙 가로지르는 움직임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앞으로만 걷는 환자들에게 뒤로도 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전환시킨다. 느릿느릿하기만 한 움직임에 빠른 리듬으로 움직임을 재촉하기도 한다. 

춤은 병들었거나 혹은 지쳤거나 혹은 다 내버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조차 인간 본연의 가장 건강한 것들을 자극한다고 믿는다. 춤의 경험. 춤이 주었던 즐거움, 환희, 성취감, 해방감 등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춤이 가진 놀라운 치유력을 믿을 수밖에 없다. 나의 사소한 문제로 인해 세션을 하지 못할 것 같았을 때, 나의 무의식이 놀랍도록 세션을 거부할 때조차도 환자들과 한바탕 춤을 추고 나면 나의 힘든 마음이 치유되어 있음을 경험한다. 우리의 춤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흔들고, 기고, 걷고, 껑충껑충 뛰고, 무언가를 전달하고, 구르고, 손뼉 치고, 손바닥을 서로 마주치고, 어깨를 부딪히고, 발을 구르는 그저 다양한 일상의 동작들에 리듬을 맞추고 움직임의 레벨이나 시간, 공간에 대한 확장을 하는 그것뿐이다.      

늦은 가을 병원으로 향하면서 땅에 떨어져 있는 단풍잎 중 가장 색이 선명하고 깨끗한 것들을 골라 지퍼백 가득 담아 세션에 간 적이 있다. 40대 후반의 남자 환우가 지난주 오랫동안 병동에만 있어서 단풍잎을 만져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단풍잎을 가지고 숨을 불어 날리기도 하고 단풍잎의 여러 가지 모양들을 춤으로 만들며 즐거웠던 기억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다. 

색색의 스카프를 가지고 다양한 이미지 작업을 할 때도 있다. 환자들은 머리에 스카프처럼 쓰며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고 드레스처럼 두르며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서로 스카프에 태워 끌어주기도 한다. 평소에 그런 무게감을 사용하지 않던 환자들은 서로를 끌어주며 무게감을 통해 존재감을 깨닫는다. 그리고 항상 혼자만 지내다가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되고 그 안에서 서로 위로를 받고 의지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현실로 돌아온 환자들이 서로를 묻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감동을 받게 된다. 

산에 오르고 싶다. 연인과 데이트하고 싶다. 부모님과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 바닷가에 앉아 석양을 보고 싶다. 계곡에 가서 수영을 하고 싶다. 스키장에 가고 싶다. 등등 너무나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지금 입원 중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 댄스테라피 시간에는 모두 가능하다.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사막에도 가고 바다에도 가고 동물원에도 갈 수 있다. 환자들의 상상 속에 갇혀 있었던 다양한 소원들이 움직임을 통해 형상화되고 춤이 되어 경험케 한다. 그들은 춤이라는 도구를 통해 현실에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보고 현실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루빨리 병이 나아서 춤으로 이룬 소원을 실제로 성취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된다. 

움직임은 그들에게 바로 지금, 바로 이곳에 그들이 존재함을 확인시켜준다. 자신의 생각 속에만 살고 있던 그들에게 한 시간 남짓 땀 흘리며 춘 춤에 무용의 치료적인 효과들이 나타난다. 지친 걸음으로 그들을 만나 오히려 에너지를 얻어 온다. 그들에게 있는 그런 순수함이 더없이 아름다운 움직임들을 만들어 낸다. 전문 무용수들이 표현해 내는 그런 테크닉은 없을지라도 그들의 춤에는 그들이 미처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아픈 마음들이 담겨있다. 그들이 몸으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고 하루속히 건강해지기를 소원한다.

지금 우리의 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마음이 아파하고 있다면 그것을 몸이 모를 리 없다. 마음이 아파 몸으로 말하는 소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자. 그래서 우리 모두 아프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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