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를 위하여

by 류완



‘모든 글의 초고는 끔찍하다.’


글을 쓰는 분들에게는 잘 알려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입니다. 헤밍웨이의 초고가 정말로 끔찍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본인이 초고에 만족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족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본인의 초고를 아끼지 않을 작가도 없습니다. 최종본은 초고에 생각과 생각을 덧입혀 타인의 생각과 만날 준비가 된 글이라면 초고는 날 것 그대로의 내 생각, 내 고백, 내 감정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 소지품 정리를 했습니다. 2년 넘게 집을 비워야 하는데 숨겨야 할 건 숨기고 버려야 할 건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리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버릴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이걸 왜 가지고 있는 건지 궁금한 물건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한참을 버리고 나니 제법 공간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사람 한 명이 자리를 비울 때, 비워지는 공간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흔적을 지운다는 일이 내 몸의 크기만큼 비운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자신을 지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때 일기장 몇 권이 손에 쥐어졌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 1학년 때까지 적잖은 기록이 담겼습니다. 가끔 기분 내킬 때마다 적었던 것 같습니다. 내용도 길지 않았고 그날의 감정이나 특별한 일을 남겼습니다. 처음에는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회상에 젖었습니다. 키득키득 웃기도 하다가 차츰 내용이 깊이를 따라 읽어 갈수록 서늘한 감정이 뒷덜미를 감싸고 올라옵니다.


어색한 문장, 유치한 생각, 그때의 알 수 없는 나의 행동들, 모두 즐거운 추억이기보다 부끄러운 기억으로 다가왔습니다. 과거는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 시절의 감정을 끄집어낼 때마다 날이 선 시린 감정이 솟아납니다. 평소 같다면 덮어버릴 페이지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부끄러움을 밀어 넣으며 끝까지 읽었습니다.






젊음은 화끈합니다. 몇 년의 기록이 담겨 있었지만, 페이지는 모두 찢어졌고 이런저런 편지들과 함께 소각해버렸습니다.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 끔찍한 감정의 기록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행동,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일입니다. 나는 내 삶의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을 버렸습니다. 일기장은 내 삶의 고백이었고, 그때의 감정을 알 수 있는 타임머신이었습니다. 모든 초고는 끔찍할지라도 초고가 없으면 완성본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때의 감정을 다시 한번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나이를 먹어서도 청소년들의 마음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릅니다.



(크라우드픽 Image)



과거의 모든 글들이 온전한 마음의 기록은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거짓된 생각과 왜곡된 감정이 넘쳐나겠지요. 그러나 기록 속에는 그 시절과 지금 내 생각의 차이, 문장력의 변화와 성장의 역사를 세심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담겨 있었습니다.


체험하기로도 대부분의 초고는 끔찍하다고 인정합니다. 여전히 내가 쓰는 글의 초고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에게 초고는 매우 소중한 자료입니다.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글은 있을지라도 버려져야 하는 글은 없습니다. 일단 써 놓은 글은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순간의 감정이 있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언젠가 꺼내어 보고 웃음이 나거나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면 그 감정의 차이를 여유 있게 찾아보십시오. 어차피 나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글입니다. 초고는 나만이 알 수 있는 순수한 고백입니다. 그 간격을 메꾸며 시간으로 적어 가는 글에 힘이 생깁니다. 쓸데없는 위선은 버리고 진실한 감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살이 붙고 의미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글의 내용이 어떠하든 초고를 완성해 냈다면 누구나 작가의 자격이 있습니다. 아직 나눌 만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낸 크리에이터이자 작가입니다. 초고라 할지라도 완성된 글이라면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아직 정제되지 않았을 뿐, 그 안에 영롱한 보석이 숨겨져 있습니다. 보석을 다듬는 시간은 지루하지만 달라져가는 모습을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도 인생의 초고 같은 그때의 기록이 그립습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날로 돌아가 태우지 않고 집 근처 산속에 타임캡슐처럼 묻어 두고 싶습니다. 하나씩 꺼내어 이야기 봇다리를 풀어내면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남들보다 작은 두뇌에 기록된 정보로는 과거의 모든 글쓰기를 꺼내어 볼 수 없습니다. 그 오래된 기록이 남아 있다면 지금은 여러분과 같이 웃으며 제 과거의 모습을 제대로 여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기억하기로는 그 시절 나의 모든 기록은 조잡하고 지질한 이야기입니다. 성장하지도 못했고 변화를 이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록은 이후에 다시 재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흥행에 참패하고 악평을 받았던 오래전 영화가 지금은 비운의 명작이라고 다시 소개받기도 하니까요. 무엇보다 어린 시절 나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시선으로 재밌는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 기회가 있다면 무심히 넘겨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안타까운 마음은 글에 대한 자세를 변하게 만듭니다.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달리진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가지만 초고라 생각하고 여과 없이 솔직한 생각을 담기 위해 노력합니다. 독자와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여러 차례 편집과 교정의 과정을 거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늦었지만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아무튼 계속 쓰다 보니 얻게 된 교훈입니다. 쓰면 쓸수록 더 오래된 나의 이야기가 그리워집니다.


오늘 일기를 쓰고 계신가요? 아니면 아무 이야기라도 적고 있으신지요? 훌륭하십니다. 당신은 지금 10년 후 보석이 될 원석을 만들고 계십니다. 모든 글이 보석이 되지는 않을지라도 수많은 글 중에 어느 하나는 인생을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로또 열장을 사는 것 보다 높은 확률일거라 확신합니다. 그러니 절대 버리지 마십시오. 절대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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