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쿼터스(Ubiquitous) 글쓰기

새로운 시대의 글쓰기

by 류완



입대를 끝으로 나의 일기 쓰기는 멈춰버렸습니다. 너무나 세세한 비밀이 다 기록되어 있던 터라 군대 가기 전에 모두 소각해버렸고 그 후로는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침 세상은 점점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 줄어들었고, 나 역시도 그런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군대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로 타자를 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총 쏘고, 훈련만 할 줄 알았는데, 웬걸 학교를 다닐 때보다 컴퓨터 칠 일이 더 많았습니다. 선임의 강요에 따라 타자를 배워야 했고 이런저런 기술들이 늘어가면서 내게 주어지는 업무 또한 늘어갔습니다. 디지털의 세상에 빠지게 되면서 자연히 아날로그의 세상은 멀어져 갔습니다. 펜보다 키보드가 더욱 친근해졌으며, 펜 자국으로 생긴 오른손 중지 손가락의 단단한 굳은살은 조금씩 부드럽게 변해갔습니다. 그러나 내가 쓰는 글은 대부분 단단하고 거친, 그리고 매우 간략한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한 줄이 넘는 문장이 없습니다. 대부분 단어는 제한되어 있으며, 글보다 숫자를 적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군대에서는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이란 것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어진 자료를 정리하거나 간부들이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 적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글쓰기에 속도가 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손가락에 속도가 붙는 것이지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가락과 키보드 자판의 경쾌한 소음을 듣다 보면 어느새 A4용지 서너 장은 금방 채워버립니다.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편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이제 글쓰기는 즐거움이 아닌 업무가 되었습니다. 제대하면 이전처럼 마음에 드는 펜을 골라 나만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다부진 결심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글 쓰는 방식의 대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학과 리포트 제출은 손 글씨로 작성해야 했습니다. 복학하고 3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컴퓨터로 타이핑된 리포트를 제출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습니다. 입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편지로 마음을 전하던 시대였는데, 어느덧 모두가 호주머니에 살포시 들어가는 호출기라는 작은 기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작아서 좋을 줄 알았지만, 그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손에 전화기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가지고 다니기에는 조금 큰 사이즈였지만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편리함이 유행을 바꿨습니다. 호출기도 사라졌고, 누구나 지갑에 하나씩은 넣고 다녔던 공중전화 카드도 선사시대 유물 마냥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아니 변해도 너무 빨리 변했습니다. 우리 세대의 글쓰기는 이제 형식과 문체의 파괴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시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감만으로 미래를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IMF를 직격으로 맞이했고 대학 학비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돈이 없는 것 보다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꿈을 꿀 수 없다는 건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반 강제로 우리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무튼 혁신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2천 년대는 느닷없이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러다 컴퓨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겠네.’


그때는 이런 농담에 맞장구치며 웃어넘겼습니다. 그런데 농담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손에 들고 다니는 전화기는 이제 스마트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 안에는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저장 공간을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컴퓨터를 켜고 지루한 부팅시간을 기다린 후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이버 공간을 터치 한 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편지를 쓸 수 있었고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기껏해야 10여 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글을 올리는 데 기다릴 필요도 없으며 누군가 나의 글을 검열하거나 제제하지도 않습니다. 자유롭게 글을 쓰지만 그 글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초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든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공간은 서울시 어디 즘에 내 몸을 두고 있지만 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알프스의 어느 골짜기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대화를 합니다. 진지한 이야기에서 농담까지, 입력을 누르는 그 즉시 모든 내용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한 공간에 같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공간에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지만 네트워크 공간 속에서 서로의 감정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시스템, 이를 한 때 '유비쿼터스'라 불렀습니다.






‘유비쿼터스’라는 단어는 1988년, 미국의 사무기기 제조회사 연구원이었던 ‘마크 와이저’가 ‘유비쿼터스 컴퓨팅’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유비쿼터스’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물과 공기처럼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자연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유비쿼터스 컴퓨팅’은 일상생활에 컴퓨터 시스템을 접목시키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 어디서나 정보와 콘텐츠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말합니다.


한 물 간 용어라고도 합니다. 지금음 유비쿼터스보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리적 개념보다 사회적 개념이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에서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개념이 네트워크 시스템의 시작과 함께 만들어진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물과 공기처럼 네트워크라는 시스템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는 놀라운 생활환경을 누리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언제 어디서나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각종 무선기기들을 통해 집이나 사무실의 장비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스마트 폰 같은 무선 기기와 SNS가 결합하면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 있는 친구들과 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다양한 자료들을 서로 주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 시스템 역시 언제 어디서나 책을 읽듯이 사람들에게 읽고 쓰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디지털이 아날로그와 만나는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화면을 구성하는 프로그램 속에는 0과 1만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울고 웃고 노래하며 감동을 얻습니다.





이제 글을 쓰는 일은 시간이나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24시간, 안에서 종이와 펜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나 글을 쓸 수가 있습니다. 물론 생각해 보면 종이와 펜 보다 훨씬 비싼 컴퓨터나 스마트 기기를 사용해야 하지만 한 번 구입하고 나면 끝없이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은 이전의 아날로그 글쓰기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글의 형태도 다양합니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글쓰기를 벗어나 양방향으로 서로의 글을 나누고 비평하고 응원하면서 글이 발전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공동 집필이 쉬워졌으며 글을 재 생산하거나 여러 번 편집하기가 쉬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정보의 습득이 이전보다 월등히 쉬워지면서 글을 만드는 시간도 크게 단축되었습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몇 년을 통해 다듬어지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한 두 달이면 뚝딱 책 한 권을 발표해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비쿼터스 사회는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나 존재 하지만 존재 자체를 숨길 수 없으며 정보를 나눔과 동시에 원치 않는 이들에게 내 정보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모습을 숨긴 채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막말과 욕설이 난무하기도 하고, 거짓과 사실을 빠르게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내어 놓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가면을 쓰고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 합니다.


특히 타인에 대한 허위 사실이나 거짓 정보는 일시적 감정과 유희를 위한 대가 치고는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맙니다. 유명인이 되면 누구나 악플과 비난의 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 힘에 무너져 삶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유명인사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열심히 쓴 글, 그림, 혹은 사진에 물음표 하나만 붙어도 밤잠 못 이루는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유비쿼터스 시대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표현의 자유와 글이 주는 폭력성에서 우리 모두를 지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입니다. 법적인 제재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제제도 이미 받은 상처와 무너진 이미지를 다시 세워주지는 못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어느 곳에서든지 내 글보다 인격이 먼저 존재할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절을 지켜 대화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 하나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문화가 네트워크 속에서 지켜지는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어렵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주어진 환경만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미숙하고, 두려워하며,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더욱 필요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누구나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 이를 우리는 인문학 (人文學, humanities)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최근 들어 가장 인기 없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반도체, 기술혁신, 융합, 친환경, 인공지능이 미래라고 외치는 동안 인문학은 도서관 가장 어두운 곳으로 밀려나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건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학문, 인문학으로 귀결됩니다. 생산자도 사람이고 소비자도 사람이며 문제점을 발견하고 인식하고 고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인류 역사는 인문학이 밀려난 시대에 맞이한 참혹한 흔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가 그랬으며, 산업혁명기에도 그랬고 세계대전을 겪을 때도 인문학은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밀려나 버렸습니다.


참혹한 역사를 겪고 나서도 전쟁은 끊어지지 않고 있으며 총, 칼이 아니라도 경제와 바이러스 전쟁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세상을 살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부동산, 암호화폐, 주식과 은행 금리가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데도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있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숫자의 변화에 사람들은 울고 웃습니다. 숫자의 변화가 한 사람의 심장 박동보다 소중한 세상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또다시 인문학의 위기라고 불리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시선을 돌려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시선만큼 직관적인 요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유비쿼터스 시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면 우리는 더 많은 이들의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남기는 글이 내 모습이라 생각하며 신중하게 글을 쓰고 타인의 다른 생각에도 너그럽게 바라보는 여유가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살피라'는 채근담의 어록입니다.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수 백 년 전, 누군가가 남긴 당부의 글이 지금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말이 되었습니다. 디지털이 아무리 세상을 빠르게 바꾼다 하더라도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느 곳에서 나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내 글이 존재하는 공간에 내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은 SF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입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글쓰기는 타인을 위한 배려일 뿐만 아니라 내 생각의 깊이를 조율하는 유비쿼터스 글쓰기의 기본이 아닐까요? 근대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한 철학자의 명문을 재고하며 짧은 생각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르네 데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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