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쓰인 글은 대부분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유명한 작가들도 그랬을 텐데 나라고 처음부터 완전한 문장을 만들어 낼리는 더욱 없습니다.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머리에 담긴 채로 손가락을 움직여 글을 완성하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글은 머리에 그려진 것만큼 아름답지가 않습니다.
내용이 산으로 가는 것을 알고 나면 타이핑 속도만큼 글에 대한 자신감도 줄어듭니다.
버리긴 아까워 대충 제목을 붙여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저장해 둡니다.
며칠 후 다시 꺼내보면 왜 이런 생각을 했었는지 의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다른 인격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글은 생각의 왜곡을 이끕니다.
지금도 이 글을 써 내려가는 순간의 생각과
모니터에 문자로 찍히는 의미는 조금씩 틀어진 간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랍을 이용합니다.
일단 감정이 흐르는 대로 쓰다가 더 이상 글이 나오지 않으면 서랍에 담아 둡니다.
이곳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브런치는 서랍 하나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햐얗고 텅 빈 서랍에 하나 둘 글이 쌓이기 시작하더니
언제 썼나 싶을 정도로 오래된 글이 저 밑에 쌓여 있습니다.
고맙게도 브런치는 그 서랍을 작가의 서랍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내가 작가라니......'
제법 두툼하게 쌓인 서랍의 글들을 돌아보니 쓰고 나서 여러 번 고친 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차마 지우지 못하고 조금씩 뜯어고친 글인 것 같습니다.
한 번 머릿속에서 출발한 생각을 쉽게 지워버리기란 여간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생각이 나만의 온전한 창조물 일 수는 없을지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누군가와 공유되지 않은 채 지워지는 것 또한 진한 아쉬움을 남깁니다.
많은 작가들이 서랍을 이용했습니다.
마가렛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10년 동안 서랍에 보관했으며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은 3년 동안 수정을 거쳐 지금의 명시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소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17년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그의 글이 서랍에 담겨 있던 시간입니다.
명작이 그러한데 내 글이 서랍에 좀 담겨 있다고 해서 꼭 버려져야 하는 것도 아니겠지요.
그런데 서랍은 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서랍 안에 담긴 글들은 자주 꺼내어보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밑으로 깔리게 되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글은 다시 찾아 읽고 수정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글들은 글을 쓸 때 느꼈던 감동과 감정을 잃어버린 채
어떻게 다시 글을 이어가야 할지 방향 자체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감정이 폭발할 때 써 두었던 글이 있습니다.
단 번에 써 내려간 글이었습니다. 쓸 때는 술술 잘 쓰인 글입니다.
자신 있게 서랍에 넣어두고는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다시 서랍에서 꺼내어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읽어 내려갈수록 자신감은 민망함으로 변해갔습니다.
도저히 공유할 수 없는 글, 정제되지 않은 감정에서 오는 작지만 제법 큰 오류입니다.
서랍 속에서 쉰내 풀풀 나는 글의 제목을 보고 있으면 한 숨이 나옵니다.
나는 저 글을 쓰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저 글은 과연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진지한 고민이 이어집니다.
딱히 답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습관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매일 글을 쓰지는 않더라도 매일 서랍을 열어보는 습관입니다.
남의 글은 돈을 주고도 잘 읽는데 내 글이라니 돈도 안 들고 뭐가 힘들겠습니까?
매일 열고 닫고, 그러다 단어 하나라도 바꾸다 보면 생각이 새롭게 이어지기도 하지 않을까요?
하루는 재밌는 경험을 한 적도 있습니다.
서랍에 글이 여러 개 쌓여 있는데 글 두 개가 비슷한 느낌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하나의 글에서 내용을 가져다 다른 글에다 이어 붙였습니다.
그럴싸한 하나의 글이 되었습니다.
반칙 같지만 글쓰기는 때론 뜻하지 않은 생각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게 또 글 쓰는 재미기도 하지요.
작가에게 서랍은 어쩌면 종이와 연필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일지 모르겠습니다.
장을 담그듯 글의 종류에 따라 사흘에서 나흘은 묵혀 두면 글에서 색다른 맛이 날 수도 있고
정성을 들여 오래 묵히면서 매일 조금씩 살펴봐 주면 명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서랍 속에도 도저히 글 같지도 않은 글이 오랜 시간 묵혀 있습니다.
이건 앞으로도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이 없을 거라 장담하면서도
어떤 감정의 변화로 가지를 치고 다듬어서 제법 멋진 글을 만들어 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종종 돌아보면서 시간이 만드는 글의 힘을 배워가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