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따라 부푼 가슴으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제껏,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정성을 다해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그것 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린 시절의 아픔, 학교 폭력과 아버지와의 갈등까지, K의 이야기는 그의 최대 관심사처럼 느껴졌다. 상담을 받게 된 것은 아내의 권유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병원 앞에서 주저하던 자신의 모습을 꾸짖고 있다.
K는 이토록 강력한 의지로 자신의 모든 삶을 토해내게 될 줄은 몰랐다. 토해낸 생각들이 차례차례 쌓여 산을 이루었다. 정신과 의사의 시선은 실로 대단했다. 생각의 틈을 벌려 꺼내어지지 않은 생각까지 집게로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찾아갔지만 K는 이제 그 시간이 간절히 기다려진다. 미쳐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의 기억마저 어딘가에 부딪쳐 생각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럴 수가 이렇게 다양한 내가 존재했다니...... 나는 왜 지금껏 나 자신을 스스로의 틀 안에 가두고 규정했던가.' 그의 고백에 거짓은 전혀 없었다.
도무지 터뜨릴 수 없었던 생각까지도 괜찮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 모두가 괜찮지 않다고 했고 그 생각에 따라 자신의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당연히 기분 좋을 리 없다. 문제 있는 인간이라 스스로 정의 내려야 하는 현실 앞에서 K는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K에게 정신과 상담은 무너져가는 삶을 떠 받쳐주는 지지대가 되었다. 여전히 기울어져 있는 삶이지만 떨어지고 있는 낙차의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대로 멈출 수만 있어도 숨은 쉴 수 있으리라 기대가 되었다. 일주일 치 약봉지는 정당한 지불을 했음에도 정신과에서 주는 선물처럼 여겨졌다. 손에 쥐고만 있어도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고통의 삼분의 일은 나은 것 같았다.
집에 거의 도착할 때 즘이었다. 미세한 진동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반가운 이의 연락이다.
"잘 지냈냐?"
친구, S의 목소리. 언제나 그렇듯 인사는 짧게 끝난다.
"그럭저럭, 너는 잘 지내?"
"내 사정 뻔히 알면서...... 한 번 봐야지?"
S는 사족을 늘여 뜨리지 않는다. 항상 본론만 꺼내 드는 그다. 바쁘면 바쁜 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 알기 쉬운 친구여서 마음이 힘들 때 만나도 불편함이 없다.
"그래 마침 여유도 생겼고. 언제 볼까?"
"지금 시간 돼? 나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인데. 그쪽으로 지나가면 될 것 같아."
실망시키지 않는 대화, 항상 느닷없는 친구였다. K는 그런 친구가 싫지 않다. 아니 평범하지 않아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정 반대의 성격은 묘한 매력을 뿜어 낸다.
한 시간 뒤 약속 장소에서 친구를 만났다. 2년 만에 만난 친구는 제법 초췌한 모습이다. 작업복 차림은 아니지만 신발과 바지 끝 단에 묻은 얼룩이 그의 고단했던 하루를 짐작케 한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실패하고 들어온 친구는 빚을 갚느라 그동안 만날 여유가 없었다. K는 그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가끔씩 힘들 때마다 자신의 불편한 삶을 위로하는 구실로 삼았다.
기분이 한 결 편해진 K는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얇아진 지갑에도 불구하고 1인당 4만 원이 넘는 참치회 한 접시가 아깝지 않았다. 대중음식점에서 평범하게 먹고 마시는 식사, 얼마만인지 모른다. 낯선 이들 사이에서 식사 시간이 길어지는데도 가슴이 답답하지가 않았다.
고혈압 때문에 술을 끊었다는 친구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너 만날 때만 마시는 거야."
K는 송장 치르기 싫다며 마시지 마라고 말하면서도 정성스럽게 첫 잔을 따라주었다. 한 잔 술에 취할 리 없겠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잔뜩 취기가 오른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이런저런 이야기에 핏대를 올리며 떠들어댔다. 음식이 떨어져 갈 무렵 S는 술 병을 비우고 잠시 고민하더니 분위기를 바꿔 보자고 제안을 건넸다.
"아쉬운데 2차 가야지?"
"그래 어디로 갈까?"
"배는 부르고, 와인이나 한 잔 하러 가자."
"너 그런 것도 마시냐?"
"베트남은 소주보다 와인이 더 싸거든."
자리를 일어서며 옷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내는 순간 주머니를 채우고 있던 약봉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제법 두툼한 약봉지가 신경이 쓰였을까? S는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길에 조심스럽게 약의 용도를 물어보았다.
"어디 안 좋아?"
"별거 아니야. 정신과 약이야."
"그런 게 안 좋아도 약을 먹어?"
"나도 내가 이런 거 먹을 줄은 몰랐다."
짧게 이어진 침묵은 무채색의 심플한 간판 앞에서 끊어졌다.
"와인 바? 가게 이름이 너무 심플한 거 아냐?"
"이름만 저렇지 맨날 커플들로 북적거려. 뭔가 특별한 게 있겠지. 들어가자."
평소 눈여겨보기만 했던 곳이다. 끈적끈적한 커플들이나 찾는 곳이라 여기며 부러운 시선으로 스쳐 지나가던 곳이었다. 마침 취기가 오른 친구가 와인을 찾은 덕에 스스럼없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젊은 웨이터가 메뉴판을 건넸다.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고 S는 와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K는 S의 모습이 제법 멋지게 느껴졌다. 아는 척하며 어려운 이름으로 된 와인을 골라 발음을 굴리며 선택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모르면 모르는 데로 질문하며 취향껏 고르는 모습이 더 괜찮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런 녀석이 사업에 실패하면 누가 성공하는 걸까 답답한 궁금증이 가시질 않는다. K의 생각을 들었을까? 난데없는 S의 대답은 의문의 답이 되었다.
"내가 사실 너무 순진해.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고, 막 물어보고 그러거든. 잘 모르는 게 티가 나니 만나는 사람마다 다 속이려 드는 거야. 그러니 안 망할 수가 있나. 그래도 저 웨이터는 속이지 않겠지 뭐."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속이는 거 아냐? 오래되거나 안 팔리는 거 팔으려 하고..."
"아, 뭐 어때? 와인 한 잔에 내가 신용 불량자 될까 봐? 그럼 뭐 좀 속아주고 그래야지."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면 K는 S를 노벨 평화상에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한 것이 따로 있을까? 거짓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참 많이 달라질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약 먹으면 정말 괜찮아져?"
"약? 아. 아까 그 약?"
"정신이 나갔다가 약 먹으면 다시 돌아오고 그래?"
K는 순간 사람이 너무 솔직해도 문제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졌다. 악의는 없겠지 싶어 감정을 털어내고 답변을 이어갔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면 신체적인 이상이 생기곤 하니까 미리 예방하는 거지."
"어떤 이상?"
"호흡곤란, 두통, 어지러움, 구토, 무기력 같은 증상인데 복합적이야. 이것저것 같이 오거든."
"뭐야. 그거 겁나 아픈 거네. 그걸 어떻게 참어?"
"그러니 약을 먹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지니까."
"그래. 그것도 참 어려운 문제네. 그러고 보면 난 참 축복받았어."
"뭐가?"
"난 부도나고 빚더미에 오르고 고소까지 당했는데도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거든. 천성인가 봐. 걱정이 오래 이어지지가 않아."
"그래 그거 하난 정말 부럽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른다. 항상 안타깝게 여기던 친구에게서 K는 위로인 듯 걱정 어린 시선을 받았다. 솔직히 거짓말 같았다. 저 상황에서 그럴 수 있다고? 마음속에서 거짓말하지 마라는 생각이 요동친다. 그 순간, S는 K에게 카운터 펀치 같은 한 마디를 건넸다.
"괜찮아, 어떻게든 될 거야. 우린 아직 잘 살고 있잖아?"
뜻밖의 응원에 K는 시선을 떨구고 입을 다물었다. 그저 살아 내고 있는 현실에 '잘'이라는 부사를 넣을 수 있는 S의 생각이 놀라웠다. 잘 살고 있다는 고백은 못 살고 있으리라는 자신의 상상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순간 와인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볼록하게 부푼 표정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내 말이 이상해?"
"아니, 그냥.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ㅋㅋㅋ"
그리고 두 사람은 제법 긴 시간을 소리 내어 웃었다. K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도 S가 왜 따라 웃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른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대화였다.
헤어진 후 K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는 S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고마워. 너 때문에 정말 오래간만에 웃었다.'
K는 그 날, 자신이 한 말 중에서 가장 솔직한 고백을 문자에 남겼다.
몇 달 전, 수면제를 끊어보려고 정신과 상담을 받은 후, 약을 처방받았습니다. 호기롭게 삼킨 약이지만 온 몸에 힘이 빠지고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하릴없이 침대에 누워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무한 상상을 했습니다. 상상을 하지 않으면 이 약이 나를 어디까지 끌어당길지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 잡힐 것 같았습니다.
상상의 시작은 병원을 나선 그 날의 기억입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오래전 한 친구와의 만남으로 이어지더니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재밌다고 생각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써 내려갔습니다. 대충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런 게 단편 소설인가 싶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경험에 감정을 풀어냈던 에세이와 달리 상상력에 따라 움직이는 글은 묘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자유로운 생각이 주는 장점이 그러합니다. 한 달 전에 써 두고 몇 번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과정도 즐겁습니다. 에세이는 수정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소설은 마음껏 수정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허구가 더 깊은 허구로 들어 갈수록 이야기의 깊이를 더하고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허구로 다가간다 할지라도 글은 작가의 표정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 번 다른 이야기를 써보려고도 했지만 다시 또 읽어보니 어디서 많이 본모습이 떠오릅니다. 결국 내 이야기고 내 얼굴이며 내 마음속 깊은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짧은 단편을 쓰면서 소설을 쓰는 이들의 고뇌와 열정이 손 끝으로 닿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좋은 소설에 대한 정의가 따로 있겠습니까? 모든 상상은 그 나름의 힘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굳이 특별히 느낀 생각을 적어보자면 소설가의 힘은 상상력으로 더 멀리, 더 넓게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음이 힘들어 이 곳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얼마 전 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내가 도전해 보지 않았던 이야기를 써내려 갔습니다. 머리가 아프면서도 재미있네요. 비록 혼자만의 세상일지 몰라도 상상의 크기가 넓어지는 느낌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