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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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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Dec 24. 2023

반반 결혼은 낭만적이지 않아.

비합리적이라서 아름다운 것.

만약 우리 부부가 대학교가 아닌 사회에서 만났더라도 결혼할 수 있었을까. 낭만적인 대답을 하고 싶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나이 서른을 넘기고도 밥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자는 연애의 기회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을 테니까. 서른일곱이 되어서야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함께 살기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학과 후배이자 다섯 살 어린 아내가 먼저 사회인이 되어 늦은 남자친구를 기다렸다. 이런 미스 매치로 인해 사회에서 만났더라면 우리의 만남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으리라. 스물여섯, 스물 하나. 사람 뒤에 덧붙은 배경의 의미를 깨닫기엔 다소 어린 나이에 시작한 연애라 결혼할 수 있었다고 짐작한다. 조금 달리 보면, 조건을 따지기엔 둘 다 갖춘 게 없던 시기에 만나서 서로를 보이는 대로 봐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삼사십 대에 접어들어 결혼 상대를 찾는 지인들이 꺼내놓는 고민을 종종 듣는다. 누구는 자기가 눈이 높아서 문제라며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누구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데도 괜찮은 사람이 없다고 토로한다. 사정은 다양해도 고민의 밑바닥에는 비슷한 기류가 흐른다. 자신이 가진 것과 상대가 가진 것을 견주어 보는데, 좋은 짝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 나 역시 지금 나이에 미혼이었다면 사정은 다르지 않았을 테다. 조건에 맞는 배우자를 찾아 결혼 시장을 배회했겠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을 게 빤하다. 나이는 많고, 안정적인 직업도 갖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배우자를 찾는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스펙을 보며 전자 제품을 고르듯 배우자도 갖춘 것을 보고 고르겠다는 가치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주입받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책 <소유냐 존재냐>에서 "우리의 사회경제적 체계, 즉 우리의 생활방식의 특성들이 병적 요소를 품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병든 인간과 병든 사회를 만들고 있다."라고 언급한다. 현대 사회의 생활방식이 우리를 병들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우리의 사회경제적 체계는 곧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로 돌아가고, 소비는 소유를 전제로 하며, 현대인이 소유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자아라고 그는 말한다.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나의 자아이다. 자아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자신의 육체, 이름, 사회적 지위, 소유물 (지식을 포함한), 그리고 스스로 품고 있고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 등. 우리의 자아는 지식이나 능력 같은 실질적 자질과, 실재하는 핵심의 언저리에 우리가 쌓는 허구적 자질의 혼합물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점은 자아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각기 소유물로 느낀다는 점, 그리고 그 "사물"이 우리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중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자아에 더 많은 물질과 경험 그리고 쾌락을 채우라고 한다. 나의 자아 안에 더 많은 것을 채우면 자신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느끼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기대를 심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비대해지는 자아는 너와 나를 더욱 명확하게 구분하며, 개인을 타자로부터 고립시킨다. 소유하며 행복해지려다 외로운 개인이 되고 만다.


 




요즘의 이혼에는 특이한 경향이 있다고, 어느 이혼 전문 변호사가 유튜브에서 말했다. 과거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반반결혼"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식과 신혼집에 들어가는 비용부터 생활비까지 정확히 나누는 커플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고, 너와 나의 할 일을 정확히 엑셀로 구분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돈 정도만 각자 관리하면서 잘 사는 커플은 많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반반 나눈다는 것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반반으로 나누려는 마음의 근간에 있다. 굉장히 합리적이지만,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


애초에 사랑은 합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사랑은 합리성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 그중에서 결혼은 비합리적 선택의 절정이다. 


네 것과 내 것의 구분이 아니라, 나의 경계를 흐릿하게 놓고, 관대하게 타자를 받아들이며, 용기 있게 타자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 이득과 손해를 따지지 않는 관계를 내 삶 가장 중심부에 놓고 살겠다는 것이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존재적 양식으로서의 사랑이자 결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배우자를 찾는 일은 여전히 합리적으로 따지게 된다. 사회가 그렇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뾰족한 수는 없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성찰과 내적 수양뿐이다. 인류의 스승들이 남긴 교훈을 곱씹으며 내 삶을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오늘도 우리가 쓰고 읽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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