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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25. 2024

예정된 죽음

1.1-1.2

1.1

제이는 자신이 일주일 안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심정은 어떠할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딱히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은 없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어제 어머니 안락사 날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일주일 후면 그의 어머니는 안락사 주사를 맞고 죽을 예정이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었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는 달랐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 이외에 자신과 연관 있는 모든 물건들이 깨끗하게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 부분에 대해서 그의 아버지는 필요한 업체에 미리 연락을 해서 조치를 취해 왔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쓰던 사이버공간도 안락사 당일이면 모두 포맷되어 사라질 것이고 물리적인 공간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제이는 스케줄러를 켜고 자기의 수명과 소비 스케줄을 흩어보았다. 어제까지의 기준으로 계산한 것을 보면 수명은 아직도 32년이 남았고 재산은 십 년 뒤에 은퇴해도 죽을 때까지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는 32년이라는 숫자가 너무나 거슬렸다. 제이의 수명은 70년 이상을 살아온 자신의 어머니나 아버지보다는 십 년은 적게 사는 수명이었다. 물론 확정된 수명이 아니고 최소의 수명이기에 제이도 부모님처럼 70이 넘어서까지 살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제이에게는 그 숫자가 부담스러웠다. 물론 원한다면 그것보다는 일찍 죽을 수 있게 여러 가지 리스크에 자기를 노출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수명이 줄어들면 수명뿐 아니라 제이의 재산이나 계급이 바뀌어서 불편해질 확률이 컸다. 제이는 그런 것들을 고려한다면 차라리 길게 살아도 지금처럼 사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살을 할 수도 있지만 아직 거기까지 생각할 정도로 제이의 지루함이 극에 달하지는 않았다. 


삶이 주는 지루함의 강도를 일에서부터 십까지로 나타낸다면 제이는 지금 오에 있다. 그것을 그도 알고 있고 그의 의사도 알고 있다. 작년보다 지루함의 강도가 한 단계 더 올라왔기에 올해부터 의사는 제이에게 감정체험 시술을 시행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제이는 한 번도 감정체험이라는 시술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주변의 그 또래 다른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쯤부터 이미 주기적으로 감정시술을 받았다. 의사는 제이가 그만큼 다른 사람들보다는 뛰어난 감정 제어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것은 타고난 것도 있지만 직업적으로 훈련된 것도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제이에게 감정체험 시술은 이제까지 안 해 본 것을 한다는 것 때문에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갖게 해 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귀찮은 업무가 하나 더 늘어난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런 것이 제이는 온전히 하루를 그 시술을 위해서 비워놔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루의 시간이란 것은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으로 항상 스케줄이 빈틈없이 짜여 있었다. 


그는 스케쥴러를 켠 김에 그의 첫 번째 감정시술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변경사항은 없었고 그 시간까지 2주 이상이 남아있었다. 제이의 스케쥴러에서 반짝 거리는 커서가 가리키는 것은 어머니와의 작별시간이 새로 생겼다는 스케줄 변경 알림 표시였다. 그는 그 시간 전까지 휴식시간마다 틈을 내서 어머니와의 작별을 위해서 글을 쓰기로 했다. 물론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오늘도 그는 휴식시간을 이렇게 보내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그렇게 슬퍼할 것은 되지 않았다. 그만큼 어머니는 건강하게 잘 살아왔고 원하는 대로 많이 아프기 직전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딱 맞게 스케줄을 살아낸 사람들은 많지 않은데 그의 어머니는 운이 좋은 분이었다. 물론 그것은 운만 좋아서 될 일은 아니다. 타고난 유전자도 좋고 그만큼 성실하게 스케줄에 따라 삶을 수행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어머니 집안은 모두 그런 건강한 유전자를 갖고 있었고 그것을 잘 제어할 수 있는 이성도 갖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어머니 집안을 1급 계급으로 오래전부터 유지시켜 온 원인이기도 했다. 


제이는 스케줄러를 끄고 남은 휴식 시간은 잠을 자려고 시계를 보았다. 15분 정도 낮잠을 잘 수 있었다. 제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이렇게 일하는 중간에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책상의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을 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는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으며 일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이가 짧은 휴식을 위해서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눈을 감은 순간 밖에서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군인지 짐작했으나 그대로 눈을 감았다. 조금씩 발자국 소리가 커지고 제이의 사무실 방 앞까지 다가왔다. 제이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그대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방문을 두드리던 사람은 제이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제이, 방에 있는 거 다 알아. 잠깐만 들어가게 해 줘. 중요한 일이야.” 제이는 마지못해서 리모컨을 집어서 방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방문으로 급하게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의 친구이자 이 회사의 사장인 준호였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문제가 생겼어. 좀 도와줘야겠어.” 제이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준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무슨 문제야? 난 지금 휴식시간이고 십분 있으면 다시 일을 해야 되는데.” 준호는 제이의 책상 앞까지 다가와서 눈을 크게 뜨고 빠르게 대답했다. “너라면 오분도 안 걸려. 어제 받은 샘플집단을 비교해서 내가 판단한 게 맞는지 한 번만 봐줄래. 이메일로 보냈으니까 한 번만 봐줘. 그리고 코멘트도 보내줘.” “너 요즘 이상하게 왜 그러는 거야. 항상 하던 일인데 왜 자꾸 나한테 검토를 부탁하는 거야?” 준호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는 눈에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얼굴빛도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이는 그런 준호를 쳐다보지 않고 모니터 화면에서 그가 보낸 자료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쿵 소리와 함께 준호가 책상에 부딪히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야 제이는 자기 앞에서 쓰러진 친구를 보기 위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들어 스케줄러에 구급차를 부르라는 요청을 했다. 책상옆으로 쓰러진 준호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그의 옆목에 손을 대서 맥박이 뛰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그의 맥박은 뛰고 있었다. 준호의 얼굴은 조용히 잠들어 있는 표정으로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구급대원들이 들어왔다. 제이는 그들에게 준호가 들려 나갈 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휴식시간이 다 지나고 십 분이나 더 낭비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준호가 병원에 있는 동안 회사는 조용하게 잘 돌아갔다. 어차피 준호의 일은 그가 없어도 정해진 매뉴얼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그의 몫의 일들은 직원들에게 적절하게 배분되었고 그의 의사결정이 필요한 일은 그가 병원에서 직접 처리했다. 그러나 회사 사람들에게는 그가 체력 관리를 잘못해서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이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평소대로라면 그는 철저하게 계획된 행동만 하고 어떤 경우에도 욕심내지 않고 자신의 체력 안배를 정확히 하면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요즘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주한 일도 없고 회사는 무리하지 않게 잘 돌아가는 시기였다. 그가 왜 과로로 쓰러졌는지는 의문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준호를 회사에서만 보는 사람들에게 있는 미스터리였다.  제이는 친구로서 준호를 알고 있는 사이였지만 그의 사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최근에 준호가 그가 쓰러지던 날 했던 부탁과 같은 재검토 부탁을 그에게 몇 번 했다는 것이 제이가 아는 전부였다. 그것으로 제이는 준호가 평소와는 달리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준호에게 직접 묻지도 않았고 깊이 따져보지는 않았다. 제이는 자기의 삶도 아닌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깊게 알고 싶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이나 동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2

오경수 박사는 계속 잠이 오는 자신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하루종일 밤을 새워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때가 그리워졌다. 이제는 두세 시간이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온몸이 피로에 휩싸이고 있었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약으로는 고쳐지지 않는 기본적인 노화의 증상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폐 한쪽에서는 곧 암으로 발전될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평상시와 같은 몸의 컨디션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일주일 후 죽음을 앞두고 스무 살에 집을 나가서 연락을 끊은 그녀의 둘째 아들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체력이 이렇게 급격하게 저하될 줄은 상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그녀는 책상에 엎드려서 눈을 감고 체력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집중해서 그녀의 둘째 아들을 찾았다. 그녀가 특별히 스케줄도 없으면서 자기 방에서 컴퓨터를 보면서 하루종일 나오지 않는 이유를 그녀의 남편만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둘째 아들은 정확히 9년 8개월 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누구도 본 적이 없으며 한 번도 연락을 해 온 적도 없었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사고가 난 줄 알고 모든 병원과 경찰서를 뒤졌지만 그에 대한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학교를 잘 다니고 항상 친절하던 아들이었는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이후 오경수 박사는 어머니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관심을 쏟아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아들을 찾았지만 아직 아들에 대한 작은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의 첫째 아들 제이나 그녀의 남편인 김정훈은 그렇게 둘째 아들을 찾는 그녀를 모르는 척 내버려 둘 뿐이었다. “2124년 11월 1일 정오에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들의 어머니인 오 경수 우주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컴퓨터 화면에 자기의 죽음을 알리는 문구를 적어봤다. 그녀는 우주라고 썼지만 사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게 되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익숙함을 더 누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집을 나간 아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죽을 날짜를 변경하고 싶었다. 


그녀가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뒤져서 아들의 흔적을 찾는데 집중하고 있을 때 그녀의 남편이 서재로 들어왔다. 그녀는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의 남편이 책상 가까이로 다가오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뭘 그렇게 하는 거야?” 김정훈의 목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깬 듯 눈을 크게 뜨고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냥 뭘 좀 찾고 있어.” “그만하고 날씨도 좋은데 같이 산책이나 나가지 않을래? 저녁에 제이가 온다니까 같이 마실 와인도 한 병 사 오고.” “난 힘드니까 혼자 갔다 와.”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윤이를 찾고 있는 거야? 데이터베이스에 남겨지지 않는 곳으로 간 게 분명하니까 헛수고하지 말아.” “그래도 병원이나 경찰서에 가게 되면 분명히 흔적이 남을 거야.” “윤이가 원하면 우리에게 연락을 하겠지. 이제 그만해.” 정훈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보고 오경수박사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당신 혹시 윤이에 대해서 나에게 말하지 않은 뭔가 아는 게 있어?” “그런 게 어디 있어. 윤이 이야기는 그만해. 제이도 온다니까 좋은 기분으로 있자.” 그 둘은 말없이 서재를 나와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따스한 가을의 오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경수박사가 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가 아주 조그맣게 거실로 새어 나왔다.


김 정훈은 방에서 화를 삭이면서 앉아 있었다. 수십 번이 이야기해도 아들에 대한 부질없는 조사를 자꾸 하는 그의 아내가 답답하기만 했다. 아들의 가출때문에 그에게는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겼는지 모른다. 그런 것들에서 아내는 조금 더 자유로웠다. 오경수박사는 원래 타고난 좋은 유전자 덕분에 정신과의사로 평생 일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경계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그는 아들의 가출로 인해 여러 가지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가 평생 꿈꾸던 경찰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남들보다 먼저 은퇴를 해야 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도 항상 그의 이름뒤에는 아들의 가출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것은 자신의 계급을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로 커다란 오점이었다. 그때부터 정훈은 둘째 아들에 대한 존재를 어느 정도 증오하며 살았다. 그 증오는 점점 커져서 아들뿐 아니라 아들에게 미련을 못 버리는 아내에게도 생겨났다. 물론 그 증오는 일정 부분 자신의 완벽하지 못한 유전자에 대한 증오였다. 다행히도 첫째 아들 제이는 완벽한 유전자를 갖고 계급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같이 산책 나가자.” 정훈이 오경수 박사의 방을 두드렸다. 아무리 못마땅하더라도 정훈은 오경수박사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늘 체력을 좀 보충해서 내일 찾아보자. 나도 도울께. 빨리 나와. 해지기 전에 걷고 오자.” 그제야 오경수 박사의 방문이 열렸다. “정말 내일 나를 도와줄 거야?” “그래, 당신이 원한다면 도와줄게.” 정훈은 마지못해 말하는 듯했으나 그것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정훈도 마지막으로 그녀의 소원이라면 아들을 찾아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타협점을 찾고 산책을 나섰다. 초가을이라 아직은 햇살이 더웠다. 정훈은 아직 더 살아야 할 날이 많지만 아내와 살날은 이제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 산책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것에 대해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집을 나와서 걷는 동안 아무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정훈은 옆에 있는 오경수 박사를 돌아보면서 말을 시키려다가 참았다. 반면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이 거리와 햇살을 모두 눈에 담고자 하는 오경수 박사의 얼굴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정훈은 오경수 박사의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름답네.” 정말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느끼는 표정으로 오경수 박사가 숨을 쉬듯 감탄의 말을 조용히 뱉었다. 정훈은 말없이 그런 오경수 박사의 손을 잡았다. 


정훈은 아름답다는 말이 가슴에서 나와서 가슴으로 들어와 울려 퍼지는 것을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느꼈다. 그것은 심장에 새로운 박동을 일으키고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감정체험시술을 받을 때도 이런 느낌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정훈에게 뭔가 이상한 점을 느껴졌는지 오경수 박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40년간 정신분석을 해온 노련한 정신과 의사의 눈빛이었다. “오늘 당신 감정이 많이 올라와 있네.” “그런가? 오랜만에 산책하니까 기분이 좋아. 날씨도 좋고. 사십 년 전에 유리가 데이트하던 때가 생각나.” 정훈은 스스로도 놀라운 내면적 경험을 하고 있음을 아내가 알아 차린 것에 살짝 놀랐다. “혹시 당신은 알아? 제이는 결혼할 상대를 아직 찾지 못한 걸까?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어. 이야기를 안 하니까. 하지만 곧 결혼할 상대를 찾겠지. 나이도 있고.” “내가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제이가 결혼하는 걸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산 것 같은데 아들들에게는 조금은 후회가 남아. 내가 더 신경 썼으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경수 박사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정훈은 마치 자신이 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마음이 이상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저기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네. 한번 가보고 싶은데 저녁을 먹기 전에 커피를 마시기는 좀 그렇고.” “들어가 보자. 당신이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서 다른 차라도 마시고 나오자.” 정훈은 망설이지 않고 오경수 박사의 손을 끌어서 카페에 들어갔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카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은 거의 혼자 앉아 있었다. 오경수 박사가 좋아하는 자리는 일층의 오른쪽 앞쪽의 코너 자리였다. 2면이 유리로 된 카페에서 그 자리에 앉으면 양쪽의 유리를 통해서 거리를 내다보면서 멀리 정면으로는 건물들과 북한산 정상에 있는 서울 C타워를 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경수 박사는 자리에 앉아서 숨을 돌렸다. 그 사이 정훈은 차를 두 잔 사가지고 돌아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경수 박사는 정훈이 온 줄도 모르고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면으로 산 위에 보이는 C타워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날이 맑아서 저기 C타워가 선명하게 보이는군.” 정훈이 중얼거리는 것도 오경수 박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최근 일 년을 빼고 성인이 되어서 거의 평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낸 곳의 겉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곳에서 있었던 그녀의 모든 날들이 영화처럼 장면마다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 카페가 생기기 훨씬 전 그녀가 아주 어릴 적 이곳에서 바라보았던 북한산의 모습도 기억이 났다. 그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네 산책을 하면 계절마다 북한산은 각기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아버지 오병율 박사는 어린 그녀에게 항상 세상이 바뀌고 있는 걸 잘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아버지의 말처럼 그녀는 세상이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세상이 바뀌고 있는 걸 잘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 그러면서 나에게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 되라고 했어. 내가 세상을 바꾸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했어.” “당신은 평생 그렇게 살아왔잖아.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지는 모두가 다 알아.” “열심히 살았어.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낯설게 보이지.” “뭐가? C타워?” “응””오랜만에 외출해서 그럴 거야. 차 좀 마셔봐. 당신이 좋아하는 민트차야.”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모든 게 선명하게 기억나. 그런데 이제 나는 사라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와. 죽음을 기다리는 게 이런 기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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