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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는 근무를 마치고 48시간 만에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수심 50미터 아래의 해저 센터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지 5년이 넘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매번 지상의 공기는 그녀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육지의 날씨는 최고였다. 그녀는 서둘러서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년이면 30살이 되는데 그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는 결혼 상대자를 먼저 찾아야 했다. 하지만 주말 이외에는 대부분 해저도시에서 근무하는 그녀가 같은 회사가 아니면 결혼할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오늘은 특별히 휴가를 내서 사람을 만나는 날이다. 얼마 전 매칭 사이트에 올려놓은 그녀의 프로필을 보고 데이트를 신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몇 번 그런 요청이 있어도 상대의 프로필을 확인하고 데이트를 거절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데이트를 요청한 상대는 1급 연구원이었다. 누구나 꿈꾸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얼굴도 준수하고 키도 컸다.
집으로 들어서자 각종 식물 화분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녀의 집은 평소처럼 아주 조용했다. 여러 가지 식물들 중에서도 유미가 특별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끼 식물들은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거치대에 층층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실의 한쪽 벽은 모두 그 이끼 식물들의 보금자리였고 대부분 거치대를 벗어나서 벽까지 퍼져나가 자라고 있었다. 유미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그녀를 반겨주는 것은 그들의 특이한 향이었다. 유미는 그 흙냄새 같으면서도 약간 비린 이끼의 향을 좋아했다. “아, 그동안 내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었나 좀 볼까?” 유미는 거실의 벽 쪽에 붙어 있는 이끼들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손으로 살살 그들을 쓰다듬었다. 이 순간만큼은 조금 있다가 있을 어색한 만남도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유미와 이끼와의 인연은 거의 평생을 이어져 왔다. 유미는 식물 학자인 부모님 곁에서 여러 가지 식물을 어릴 때부터 접했다. 특히 아버지는 방학 때면 유미를 데리고 산속이나 강가등으로 식물 채집을 다녔다. 어느 날 숲 속의 나무에 붙어 있는 이끼를 보고 왠지 자기도 식물을 연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유미가 사춘기 때쯤의 일이었다.
유미는 이끼에서 눈을 떼고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유미는 회사에서 자신의 업무 영역을 나타내는 유니폼을 입고 근무했다. 그러나 오늘은 모처럼 그 옷을 벗고 일상복으로 입고 나갈 수 있었다. 수년 전에 데이트를 하게 되면 입겠다고 사놓은 원피스는 아직도 그녀에게 딱 맞았다. 그 옷을 입자 그녀의 햇볕에 그을린 근육이 있는 긴팔과 다리가 드러나 건강해 보였다. 그녀는 일이 없는 날에는 항상 산과 들을 다니면서 식물을 관찰했기에 그런 건강한 체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득 그녀의 이런 피부와 근육이 오늘 만나는 데이트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한 번도 1급 직업을 가진 남자들과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이런 모습을 좋아해 줄지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알고 있는 1급 직업을 가진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취향을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유미는 멀리서 1급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본 적은 있었다. 그녀가 일하는 해저도시 안에 휴양관 쪽은 1급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가족들과 휴양을 오거나 비즈니스 모임을 왔다. 물론 그녀가 일하는 연구관리동과는 떨어져 있지만 오가다가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유미는 그때 그들의 옷차림이나 모습을 잘 봐둘걸 하는 후회를 했다.
그러나 그런 후회는 쓸데없는 것이란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먼저 그녀에게 데이트를 요청한 상대방은 1급 직업의 남자였다. 그는 유미보다 정보 접근 권한이 더 많은 사람이다. 분명히 유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녀의 키나 체격 또는 피부색등은 물론이고 유미가 공개한 회사주소나 집주소등을 바탕으로 주로 다니는 장소나 만나는 사람들, 읽고 있는 책 등 데이터가 쌓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접근해서 이미 유미를 파악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유미가 일부러 더 꾸미지 않아도 이미 그 남자는 조사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미에게 호감을 갖고 데이트를 신청한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유미는 더 이상 미련 없이 방에서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시간이 되려면 두 시간은 더 남았지만 미리 도착해서 주변의 거리를 둘러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오늘 약속 장소가 있는 중앙광장 거리는 그녀가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유미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갈 수 있는 통행이 제한된 곳이었다. 유미의 부모님이 생물학 중에서도 식물분류학이 아니라 유전학이나 생명 공학을 전공하여 의사들과 같이 연구를 했다면 그녀의 직업도 1급 직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통행 제한 따위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선택은 영원한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인생을 살짝 비틀어 버린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지만 미래는 알지 못해서 살짝 비틀림을 당한다. 유미의 부모님도 그랬다. 식물분류학자이기에 2급 직업으로 분류되어 1 구역에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다.
유미는 부모님에게 중앙광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부모님들이 젊었을 때는 그곳에 누구나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연합의 표준 시민 체제가 도입되고 나서 도심의 중심은 1급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물론 오늘과 같이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중앙정부의 허락을 받아서 2급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방문은 가능했다. 유미는 집에서 항상 타고 다니던 전동차를 타고 회사와는 반대 방향으로 중심지구 앞까지 와서 내렸다. 한 번도 이 방향으로 타 본 적은 없는데 생각 보다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중심지구 역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역에 설치되어 있는 자가 심사대를 지나갔다. 유미도 사람들을 따라 그 앞을 지나가면서 왠지 모르게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 24시간 전에 출입허가를 받아서 스케줄러에도 허가증이 떠 있었지만 줄을 서서 심사대를 지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유미 차례가 되었다. 심사대 앞으로 다가가서 얼굴 인식기 앞에 섰다. 잠시 후 그녀의 앞에 있던 바가 스르륵하고 열렸다. 드디어 제한 구역으로 그녀는 발을 디뎠다. 도대체 뭔가 색다른 것이 있어서 그녀에게 이 지역은 제한 구역이 되었는지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가 없었다.
유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둘러보았다. 거리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과는 다르지 않은 사람이란 것을 조금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미는 아주 일부분을 본 것일 뿐이었다. 그녀가 본 것 이외에 훨씬 큰 차이가 1급 직업군의 사람들과 그 아래 직업군 사람들에게는 있었다. 유미는 거리 구경을 하다가 시간이 되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상대방이 만나자고 요청하고 장소로 정한 곳은 돌로 지은 오래된 신문사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신문사는 구시대의 상징물로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그 건물은 그대로 보존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서 안내원에게 꼭대기층의 레스토랑에 간다고 이야기를 하자 건물의 반대 편으로 가라고 알려줬다. 다시 건물을 나와서 건물의 뒤쪽으로 갔다. 큰길 쪽에 있던 정문보다는 초라한 건물 뒤편의 문은 작고 오래된 철문이었다. 영화에서 본듯한 오래된 철문에는 둥그런 무거운 무쇠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문의 손잡이를 당겨보아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잠겨있었다. 유미는 문의 주변 벽에 안내문이나 벨 같은 것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미는 뒷문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신문사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신문사 건물에서 문은 큰길 쪽에 정문과 이 뒤쪽의 문 밖에 없었다. 유미는 스케줄러를 보고 약속 장소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장소는 맞았다. 그녀는 상대방을 호출할까 하다가 아직 약속 시간이 십 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하고 그냥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면 상대에게 호출을 하기로 했다. 아직 해는 지려면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할 것이고 초가을의 저녁 바람은 산뜻해서 밖에 서 있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유미는 그때 신선한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그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인지 문의 손잡이를 잡고 옆쪽으로 밀어봤다. 이번에는 묵직한 철문이 천천히 옆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은 유미가 안으로 들어가자 자동으로 닫혔다. 문의 안쪽에서 노란 돌로 된 바닥과 벽이 반짝 빛을 내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유미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정면에서 은빛 거울이 유미의 몸 전체를 비추며 빛나고 있었다. “약속장소에 가려면 정면의 엘리베이터를 타세요.” 이미 유미의 존재가 진입한 것을 안 건물은 유미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은빛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가가자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도 은빛의 거울이었고 유미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서있었다. 15층 건물은 이백 오십 년 전에는 무척이나 높고 거대한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낮은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는 금세 꼭대기층에 도착해 멈췄다. 엘리베이터 밖을 나오자 전체가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레스토랑이 있었다. 입구에 서자 가상 스크린에 환영 메시지가 나왔다. “유미엔지니어, 반갑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녀가 앉아야 할 테이블의 위치가 표시되었다. 유미는 자신이 앉아야 할 테이블을 향해서 걸었다. 레스토랑은 가운데에는 좌우로 긴 바가 있고 창가 쪽으로 테이블이 듬성듬성 있었다.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 밖으로 시내의 빌딩들이 그리고 멀리 북한산과 C타워가 보였다. 해가 지려는지 하늘이 핑크빛으로 조금씩 밑에서부터 변하고 있었다. “유미 엔지니어” 어디선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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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 엔지니어” 다시 한번 또렷하게 그녀의 이름이 들려왔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제이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부드러운 턱선을 가진 하얀 얼굴의 남자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서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유미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정면에 보이는 창밖에는 이제 노을이 지려고 하늘은 오렌지빛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반갑습니다. 유미라고 합니다.” “오늘 얼마나 시간이 있으신가요? 다른 건 아니고 시간이 촉박하면 미리 여기 머무는 시간을 연장해 드리려고요.” “자정까지는 여기 있을 수 있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저는 유미 씨와 오래 대화를 한건 아니지만 저와 잘 통한다고 생각되어 꼭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한 게 있어요. 같은 직업군에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저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 “저와 잘 맞는 유전자를 가진 분들을 찾았는데 그중에서 유미 씨가 가장 인상도 좋고 호감이 가서 연락드렸습니다.”
유미는 앞에 앉은 제이의 차분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길게 시간을 끌지 않고 말하는 것도 좋았다. 그녀에게 이렇게 가까이에서 1급 직업을 가진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미 씨, 저랑 결혼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저는 유미 씨가 좋다면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유미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오늘 청혼을 받을 줄은 몰랐다. “네, 저도 결혼할 생각이 있습니다.” “유미 씨가 저를 거절하지 않으니 다행이에요. 혹시 오늘 집에 가서 부모님과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 집이 이 근처예요. 여기로 부모님을 나오시라고 하고 싶지만 부모님과 제가 살았던 우리 집을 유미 씨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요.” 유미는 제이의 눈빛에 자신이 끌려가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변에 누군가 그 광경을 봤으면 제이의 눈을 보면서 꿈꾸듯이 앉아 있는 유미가 행복하게 보였을 것이다. “저도 가보고 싶네요. 좋아요. 그런데 혹시 제가 느닷없이 방문하면 부모님이 놀라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유미 씨랑 가면 부모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제이는 유미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제이의 집은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유미는 제이가 이끄는 대로 계단을 이용해서 레스토랑에서 한 층을 내려왔다. 제이가 투명한 유리문 앞에 유미와 함께 섰을 때 센서는 그를 감지하고 문을 열었다. 유미는 그때까지도 제이의 집이 박물관 건물 안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문이 열리자 은빛 가구들이 눈이 부신 거실이 보였다. 그리고 한쪽에서 제이의 부모님이 천천히 그들을 마중 나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 경수 박사는 유미를 보는 순간 아들이 결혼할 상대를 데리고 왔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왔어요. 유미 씨예요.” 제이의 소개에 오 경수 박사와 김 정훈은 웃으면서 유미를 쳐다보았다. “반가워요. 이쪽에 편하게 앉아요. 저녁 준비 중이었는데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김 정훈은 유미를 거실에 앉게 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유미 앞에 앉은 오 경수 박사는 옆에 앉아 있는 제이를 보면서 말했다. “ 좀 더 일찍 이야기해 주지 그랬어.” “무슨 차이가 있어요.”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엔지니어라면 어떤 시스템과 관련이 있나요?” 오 경수 박사는 여자이고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아들인 제이와 많이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미는 오 경수 박사의 얼굴을 보고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공기 정화 시스템 엔지니어입니다. 서부해저도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오 경수 박사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 그렇군요. 저도 가끔 서부해저도시에 가곤 합니다. 해양식물을 이용한 공기정화로 공기 질이 좋은 곳 중의 한 곳이지요.” “네, 맞습니다. 산소량이나 질이 다른 도시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저는 유전자 재배열이 된 식물 프랭크톤을 활용한 더 강력한 산소배출 시스템을 관리하고 신 제품 개발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재미있는 주제네요. 식물은 사실 동물과 유전자가 다를 바가 없죠. 사용 방식이 다를 뿐이지. 나랑 어쩌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유미는 자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오 경수 박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느라 제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제이는 오경수 박사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말을 끊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세요. 유미 씨는 제가 호감이 가서 먼저 청혼했어요. 저보다 신체능력은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네 선택을 존중한다.” 그때 저녁 식사 준비를 다 마친 김정훈이 제이에게 손짓으로 사인을 보냈다.
오 경수 박사와 김정훈은 제이와 유미를 마주하고 식탁에 앉았다. “우리는 제이가 오는 날에는 이렇게 전통적인 식사를 준비합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걸 나도 어릴 때부터 자주 했어요. 다 좋은 재료들이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방법으로 만들었으니 맛있게 먹어요.” 김정훈은 다정한 목소리로 음식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건 청정 지역에서 기른 야채로 만든 샐러드예요. 날것으로 먹는걸 요즘에는 하지 않지만 우리는 최대한 신선한 재료는 날것으로 먹으려고 하고 있어요.” 김정훈의 설명을 듣는 유미로서는 이렇게 비싼 재료들을 사용한 요리를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부분 영양성분과 맛을 맞춘 이미테이션 캔푸드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건 야생쌀로 만든 밥이고요.” 김정훈의 설명이 다시 이어지자 제이가 말을 끊었다. “ 아버지 정성은 알겠는데 나머지 음식들 까지 다 설명하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제가 스캔해서 보여 줄게요.” 제이는 식탁 앞쪽에 음식에 대한 정보를 띄웠다. “자, 이제 먹으면 안 될까요? 배가 너무 고파서요.” “그래, 너는 어릴 때부터 항상 이게 무슨 음식이냐고 묻고 설명해 주면 빨리 먹자고 그랬지. 유미 씨, 이 아이는 궁금한 것도 그리고 배고픈 것도 못 참아요. 자 맛있게 먹어요.”
저녁 식사를 마치자 김정훈은 거실에서 유미에게 자신의 집안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여긴 우리 집안이 이백오 년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건물이에요. 지금은 신문 박물관을 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신문사였지요. 신문이란 것을 아시나요?” “네, 과거에 정보를 종이에 찍어서 전달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우리 집안은 신문사를 하다가 정보관리회사를 했고 현재는 정보감시국이 되어있죠. 저는 정보 감시국에서 일을 하다 은퇴를 했고 제이의 사촌이 정보 검사국을 맡아서 하고 있어요.” 정훈은 거실에 앉아서 야경이 반짝이는 거리를 내다보면서 유미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제이가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제이의 엄마는 죽을 날짜를 예약해 놨어요. 오늘이 지나면 이제 6일 후네요. 그전에 이렇게 아들이 결혼할 여자를 데려와서 보게 되니 좋네요. 시간이 많이 남았으면 유미 씨의 일도 서로 이야기하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텐데.” “아, 그러시군요. 저도 어머님과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아내가 유미 씨가 맘에 드는가 봐요. 최근에 힘도 없고 말이 없었는데 오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다음에는 오전에 놀러 오세요.” 오 경수 박사는 이미 오늘의 에너지를 다 쏟아 내어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아버지, 유미 씨는 이제 집으로 가야 돼요. 제가 데려다주고 올게요.”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부터 결혼을 시작할 거지? 유미 씨는 이제 너와 결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제한구역은 없어질 거다.” “알고 있어요. 가면서 유미 씨와 상의해 볼게요. 유미 씨,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잘 가요.” 유미는 제이의 뒤를 따라 집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