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늘은 내가 병원에 가는 날이야. 나 대신 가게 좀 지켜줘.” 강 씨는 다소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힘겹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열심히 설거지를 하던 윤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하세요.” 강 씨는 무거운 몸을 천천히 움직여서 주방에서 나갔다. 바를 가로질러서 출입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 가는데 시간은 더 걸릴 것이다. 윤이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하던 설거지를 멈추지 않았다. 160이 조금 넘는 키에 100킬로 되는 거구를 이끌고 아픈 관절을 움직여서 걷는 것은 고문이었다. 강 씨는 한걸음 옮길 때마다 관절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인지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더는 안 되겠어. 나 좀 도와줘.”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난간을 잡고 강 씨가 외쳤다.
윤이는 이미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 강 씨는 계단을 자기 힘으로는 올라가기 힘들다. 물론 혼자 한 계단씩 난간을 잡고 천천히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윤이가 있을 때는 항상 윤이를 불러서 자신의 왼쪽 무릎 관절을 대신해 윤이의 부축을 받아서 올라갔다. 설거지를 마친 윤이는 강 씨에게 다가가서 말없이 왼쪽 팔을 잡아 주었다. 왼쪽 무릎 관절이 아픈 관계로 강 씨는 오른쪽 발과 왼쪽 발을 다 사용해서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다. 오른쪽 발을 먼저 계단에 올린 후에 체중을 지탱해서 왼쪽 발을 끌어올리고 다시 다음 계단을 오른발을 이용해서 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올라가면 남들은 열 계단을 올라가는데 일분이 걸리지만 강 씨는 최소 십 분은 걸렸다.윤이는 강 씨의 왼쪽 팔을 잡고 무거운 몸을 한 계단 오를 때 살짝 들어주는 역할을 해서 강 씨의 오른쪽 발이 백키로의 체중을 옮기는데 조금 가볍게 도와주고 있었다.
이제 몇 계단만 오르면 입구였다. 그때 입구 출입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모두 계단 오르는데 집중하고 있어서 입구의 출입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입구의 출입문은 건물의 하나뿐인 출입문으로 꼭 지하의 바로 가는 사람만 드나드는 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출입문에 들어서자마자 알코올 찌든 냄새가 나는 지하바로 내려가는 계단 문을 열었다. “어디 가는 거야?” 윤이와 강 씨 두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여자가 소리쳤다. 그 여자는 한동안 강 씨의 바에 바텐더로 일하기도 했던 이영이었다. “네가 웬일이야? 이 동네를 떠난 줄 알았는데.” “떠나긴, 여행을 좀 다녀왔지.” “ 좀 비켜 줄래. 난 병원 가야 되니까 알아서 들어가 있어.” 강 씨는 육중한 몸을 움직이면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자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윤이는 마지막 계단까지 강 씨를 부축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이름하고 나이를 물어봐도 될까요?” 윤이가 주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뒤에서 이영이 물었다. “나이는 서른 살이고 김윤이라고 합니다.” 윤이는 돌아서서 그녀를 보며 말했지만 그녀는 조금 듣다가 그대로 바 쪽으로 가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보다 많이 어려 보였는데 많이 어리지는 않네요. 나는 서른두 살이고 이름은 이영. 시원한 맥주는 없어요?” “기다리세요. 어떤 맥주를 드릴까요?” “맥주는 다 좋아요.” 윤이는 바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이영에게 건넸다. 계단 위에서 보았을 때 보다 그녀는 훨씬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 씨가 비만과 그와 관련한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이영은 그와 반대로 영양실조와 그와 관련한 병으로 고생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들처럼 인간은 서로 다른 이유로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것을 보는 또 다른 인간은 그것으로 삶의 영감을 얻기도 했다. “점심으로 먹으려고 만든 샌드위치가 있는데 같이 먹을래요?” 윤이의 제안이 낯설고 어색한지 이영은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나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네, 잠깐 기다리세요. 제가 주방에서 가져올게요.” 윤이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영은 그런 그가 신기한지 맥주병을 입에 대고 마시면서 그가 사라진 주방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맛이 있을지 모르지만 드셔보세요. 강 씨 아저씨는 제 샌드위치를 좋아하세요.” 윤이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접시 위에 샌드위치 두 조각을 담아서 이영 앞으로 놓았다. 샌드위치 하나는 눕혀져 있고 다른 하나는 반쯤 그 위에 얹혀 있었다. 그리고 샌드위치 옆에는 꼭지를 딴 딸기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이영은 이렇게 깨끗하게 그릇에 담긴 음식을 대접받는 것이 처음이었다. 항상 식판에다 받아서 먹거나 종이에 쌓인 것을 먹었던 기억 밖에 없었다. “맛있어 보이네요. 원래 잘 안 먹는데 하나만 먹을게요.” 그녀가 먹는 것을 쳐다보며 윤이는 그 앞에서 자기 몫의 샌드위치를 한 입 물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기 때문에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윤이는 점심을 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영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어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한 것이었다. “맛있네요. 이런 샌드위치는 처음 먹어봐요.” 다행히도 이영은 샌드위치가 입에 맞는지 한 조각을 다 먹었다. “강 씨 아저씨와는 어떻게 아세요?”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예요. 여기서 바텐더도 했었어요. 근데 윤이 씨는 여기서 언제부터 일했어요?” “저는 일 년쯤 되었어요. 혹시 직업을 물어봐도 될까요?” 윤이는 이영의 손이나 얼굴빛을 보고 흔치 않은 색다른 직업이 있을 것을 기대를 하면서 물었다. “직업이요? 여기 사는 사람들 대부분처럼 그때그때 나온 노동을 하죠. 청소나 농장 작업등 닥치는 대로 하루하루 하고 살아요.”
윤이는 그녀의 대답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그녀의 손은 하얗고 가늘며 굳은 살이나 상처가 없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도 빛에 그을리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그의 대답에는 약간의 실망이 묻어 있었지만 이영은 그것을 눈치 채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그나마 그런 일도 못했어요. 너무 몸이 약해져서.” “그럼, 아까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한 것 같은데.” “아, 그건 돈벌이하고는 상관없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연극에 참여했어요. 조상 대대로 하던 극단이 있는데 이제는 없어졌지만 마지막 공연을 하고 왔어요.” 윤이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구시대의 문화를 아는 사람이었다. 윤이는 이영이 연극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고 하니 좀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면 극단이 해체된 건가요?” “더 이상 관객도 없고 무엇보다 고령의 배우들 밖에 없어요. 연극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소멸되어 가는 직업을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계속하고 있었죠. 그 덕분에 우리 집안 식구들은 모두 이렇게 하루살이 같은 신세가 되었죠.” 윤이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흥분한 이영이 숨을 돌리려고 맥주를 마셨다. 윤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맥주 한 병을 더 가지고 나와 그녀 앞에 놓았다. “그런데 연극에 관심 있어요?” “연극을 포함해서 책, 영화, 춤등 문화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 이제는 거의 사라졌지만.” “당신은 참 특이한 사람이군요. 여긴 이제 돈이 안 되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죠. 과거에는 사람들이 거기에 열광하고 돈을 쓰던 때도 있었다는데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요. 참 신기한 일이죠.” “그래도 아직 이곳에는 문화가 남아 있고 사람마다 문화에 대해서 추억하고 느끼는 것은 다 다를 겁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연극을 계속했듯이 말이죠.” 윤이의 말은 이영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이영은 이미 맥주 두 병을 마시고 알코올에 취해서 반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여긴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알코올과 담배 찌든 냄새. 구시대에도 지금도 똑같이 우리 같은 인간을 위로해주고 있는 건 알코올뿐이죠. 저 맥주 한 병 더 갖다 줘요.”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독백 같은 말을 쏟아냈다. “ 문화 같은 건 이미 다 없어지고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도 하나도 없어요. 술집이나 사창가 말고는 이 지역에 문화 같은 건 없어요. 근데 당신은 여기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아 보이는데 여기는 대체 왜 온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