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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07. 2023

굽은 등과 비교적 커다란 손

소설 같은 현실

할머니는 저녁을 먹고 나면 항상 고양이 밥을 챙겨서 아파트 화단에 내려갔다. 그때 할머니와 우정을 쌓던 고양이가 내게 해준 이야기이다.


여긴 너무 높다. 여기 한번 올라오면 아래로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다시 올라오기 쉽지 않으니 내려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는 좋은 점이 있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모든 경쟁은 낮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외롭다. 주변에 맴돌던 내 또래의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은 여기 많지 않다. 대부분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오래전부터 경쟁에서 밀린 연장자들이 많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정착한 곳에 그런 한심한 나이 든 이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나는 그들을 피해 이사를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럴 힘이 없다. 한번 아프고 나니 걷다가도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다리가 꺾이고 밥을 먹어도 잘 체한다. 그런 처지이다 보니 다시 이사를 갈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그런 힘없는 연장자들이 주변에 보이면 못 본 척 고개를 돌릴 뿐이다.  


경쟁이 심하지 않은 곳에 온 김에 나도 그저 여유 있게 느긋하게 보내고자 생각은 하지만 매번 생각뿐이다. 놀이터에 가도 동네 뒷산에 가서도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경계를 풀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앉아서 지그시 햇볕을 쬐고 하늘도 감상하고 싶다. 하품도 늘어지게 하고 기지개도 켜고 싶다. 오래된 나의 꿈이다. 그러나 그렇게 여유 있는 삶은 생각뿐이다. 

아직도 나는 매번 밥을 보면 허겁지겁 달려들어 먹는다. 나를 위해서 차려놓은 밥인데도 혹시 그게 아닌지 내가 잘못 먹고 있는지 자꾸만 둘러본다. 내 주변에 누가 있어도 없어도 나는 두렵다. 두려움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이 약해지고 나서부터 가끔 내 처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찔끔 난다. 항상 젊을 줄 알았는데 엄숙한 삶의 진리 앞에 눈물이 난다. 


그녀를 만난 그날도 별다른 일 없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동네의 가장 끝에 있는 복지회관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거기는 지대가 높고 뒤쪽의 산과 이어지는 자리여서 그늘도 많고 동네를 내려다보기 좋다. 한마디로 시간 때우기 좋은 곳이다. 그런데 복지회관보다 한 단계 밑쪽에 있는 중간에 있는 단지의 화단 옆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몸집이 작은 할머니가 내 앞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오래된 친구를 맞이하듯이 친절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인사를 했다. 

나는 처음 보는 할머니라서 나를 보고 인사하는지 모르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주변을 돌아봤는데 뒤에도 앞에도 나말고는 없었다. 그 시간은 사람들도 다 출근하고 아이들도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인 그런 애매한 오후의 시작이던 시간이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화단으로 뛰어들 수도 없고 가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어서 할머니의 인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가는 거야?" 할머니는 언제 봤다고 나에게 반말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아서 나는 그저 대답을 했다. "저 위예요." "그래? 그 위에 뭐가 있는데?" "복지 회관이요." "거기 가면 사람들이 많아?" "그런 모르겠고 저는 거기 앞마당 벤치에 앉아서 바람 좀 쐬려고요." "나도 같이 가자." 참 이상한 할머니였다. 처음 보는 나한테 반말을 하고 그리고 나를 따라 같이 가자고 하더니 정말로 나를 따라왔다. 

그날부터 할머니는 나와 같이 복지회관 앞에 자리 잡고 앉아서 아래 동네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원래 여기 사는 할머니가 아니고 잠시 딸네 집에 한 달 정도 살러 와 있다고 했다. 그 밖에도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않아서 잘 아는 것은 없었다. 자기 이야기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도 과묵한 편이라 많은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힘도 없고 의욕도 없고 모르는 할머니에게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초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한 달간은 거의 매일 할머니와 복지 회관의 흙마당을 등 뒤로하고 동네를 내려다보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러다 해 질 무렵이면 할머니 집으로 가서 저녁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신을 위해 딸이 차려준 저녁을 나에게도 나눠줬다. 할머니는 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했다. 그리고 항상 밥을 잘 먹고 다녀야 힘이 난다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그 말은 효과가 있어서 할머니가 주는 저녁밥을 먹고 난 뒤부터 나는 힘이 나기 시작해서 전보다 빨리 걸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아래 동네도 내려갔다가 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내가 몸이 좋아져서 그런지 마음의 여유가 생겨 그동안 잘 못 봤던 할머니의 모습을 찬찬히 보게 되었다. 얼굴도 작고 주름도 많지 않고 뒷모습만 보면 그냥 키 작은 아줌마 같았다. 머리 모양은 짧은 회색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염색하지 않아도 잘 어울려 보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나에게 밥을 줄 때 보면 손이 얼굴만큼 크고 손가락 마디마디도 굵었다. 만져보지는 않았지만 손바닥도 굳은살이 많이 베여 있을 것 같이 투박해 보였다. 그리고 등이 약간 굽어져 있었는데  걸을 때 보면 한쪽 다리가 살짝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많이 먹어. 바람이 차가워진다고 딸애가 나보고 나가지 말라는 잔소리가 점점 심해져. 난 집에만 있으면 답답한데."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이 다가오자 할머니는 나에게 밥을 주면서 말했다. 시무룩하고 실망한 눈빛이 보였다. "집에만 있으면 주로 뭘 하세요? 취미라도 있으세요?" "그런 건 없어. 아이들 키우고 또 손자 손녀 키우고 그러다 이제는 나만 남았는데. 화초 물 주고 잎도 닦아주고 그리고 청소도 하고. 근데 청소하는 것도 딸이 싫어해. 그냥 앉아서 티브이만 보라고 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야." 할머니는 띄엄띄엄 말했지만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그림처럼 머리에 그려졌다. 

"많이 먹어." 할머니는 그 굵고 투박한 손으로 나에게 밥그릇을 살짝 밀어주었다. 할머니의 버릇이다. 밥그릇을 한 번씩 내쪽에 있는데도 내쪽으로 밀어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먹었다. 해는 점점 짧아져서 저녁을 먹는데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어둠 가운데 나는 할머니의 눈과 어렴풋이 눈을 맞추고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작별을 했다. 비스듬한 경사가 있는 그 아파트 출입구 보도블록 위에서였다. 처음 만났던 그 장소였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할머니는 복지회관 앞에도 아파트 화단에도 보이지 않았다. "많이 먹어" 그 말만이 내 귀에 맴돌고 굽은 등과 다소 큰 손이 자꾸만 생각났다. 


오늘도 할머니가 살던 동의 입구를 지나갔다. 할머니를 혹시 마주칠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입구의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유리문에는 등이 굽고 앞발이 다소 큰 고양이가 비쳐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삶의 엄숙함을 알고 있기에 함부로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저 못 본척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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