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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16. 2023

아버지와 벤치

도시 스케치_밴쿠버

늦가을 밴쿠버에 갔다. 길고 긴 장마 같은 비가 오기 전이었다. 스텐리공원을 산책하며 수평선을 보면 하늘과 바다는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푸르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이 부시고 그리고 눈물도 찔끔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날 밴쿠버에서 바라본 파도는 끝없이 일렁이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바다와 하늘을 그리고 수평선 저 끝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태평양은 기억이 없다고 한다. 내 앞의 태평양도 그랬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고 그저 푸른 바다와 바람만이 있었다. 차가운 바다 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걸었다. 늦은 오후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걸을수록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내가 밴쿠버에 오기 전에 가졌던 모든 희망이 현실 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떤 결정이든 모두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건 용기와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공원을 정처 없이 걸어 다니다가 바다 쪽이 보이는 양지바른 벤치에 앉았다. 내가 앉은 나무 벤치에 '인생이라는 배에 탑승했으니 앞에 펼쳐진 바다가 너의 것이다.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J를 그리며'라고 쓰인 쇠로 만든 판이 붙어 있었다. 아마도 이 벤치는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J를 기억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공원 조성에 기부를 하고 벤치에 원하는 글귀를 새긴 것 같았다. 그 글귀가 평소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사람이 하던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남은 가족들이 좋아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어떤 존재가 들려주는 말로 생각되었다. 그 사람은 갔지만 그의 정신이 푸르른 태평양을 바라보며 벤치로 남아있었다. 그 글귀를 읽고 벤치에 앉아 바라본 바다는 자꾸만 나에게 말을 시키고 있었다. 마음이 바다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생각이 났다. 


매일 봐도 예쁜 강아지가 있다. 내 기분이 안 좋을 때도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서 뛰어와주면 그것만으로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강아지가 아프기라도 하면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하루종일 강아지 생각이 난다. 내가 대신 아파 줄수도 없고 시무룩하게 집에 들어가서 힘없이 누워있는 강아지를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이다. 나를 그렇게 봐주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할 때 나를 보면서 행복해하셨다. 나를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볼을 비벼 주셨다. 늦게 퇴근해서 들어오시는 날에는 내가 잠든 방에 들어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발을 주물러 주셨다. 그리고 간혹 내가 아프면 내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보고 내가 잠들 때까지 내 옆을 떠나지 않곤 하셨다. 


나도 아버지의 응원이 필요했다. 항상 나는 잘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셨는데 그런 말이 듣고 싶었다. 나를 항상 지지해 주고 나를 응원해 주던 사람이 문득 그리워진 것이다. 벤치에 앉아 있으니 햇볕이 따스했다. 여전히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차가웠고 태평양의 파도는 크게 일렁였다. 

갑자기 용기가 솓았다. 벤치의 문구가 내 가슴에 들어왔다. "너는 이미 인생이라는 배를 탔다. 배는 항구를 출발했다. 어떤 곳을 향해 갈지 그리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낄지 오직 너에게 달려있다. 그러니 겁먹지 말고 나아가라. 내가 너의 뒤에서 너를 지켜봐 주고 있을 테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아버지가 용기를 주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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