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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19. 2023

가죽 배낭과 짬뽕

도시 스케치_나가사키

기차는 항상 설렘을 준다. 더구나 이 기차는 외관이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기차처럼 검고 날렵한 독수리 부리 같은 앞모습을 가졌다. 우주정거장으로 나를 데려다 줄것 같다. 기차 안으로 들어가니 조명이 기차의 좌석 밑에서 은은하게 나오고 있다. 내 자리를 찾아가니 주변은 텅 비었다. 검은 가죽시트에 넓은 공간은 비행기 비즈니스 좌석 같이 편안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일어나서 기차 이곳저곳을 쓱 둘러본다. 뒷칸은 화려한 조명이 있는 하얀 바가 한쪽에 만들어져 있다. 간이 카페 칸이다. 무엇을 파는지는 모르지만 보기만 해도 그냥 포근한 느낌이 든다. 

다시 내 자리에 돌아와서 앉는다. 아직도 기차안에는 나밖에 없다. 좌석의 가죽 시트만 봤을 때는 어느 정도 낡은 내부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기품이 있고 안정적이다. 기차가 사람으로 치면 경험이 많은 그렇지만 점잖은 대기업 임원 같은 느낌이 든다. 좌석에 앉아서 앞을 보다 보니 앞에는 좌석표를 꽂아 놓을 수 있는 표 크기만 한 조그만 포켓도 있다. 항상 기차를 타면서 좌석에 앉기까지 표를 쥐고 있다가 표 검사하기 전에 주머니에 넣어 놓고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하며 조바심 내곤 했다. 표꼿이를 보니 나같은 표분실 염려 고객에 대한 배려가 맘에 든다. 기차를 많이 타본 사람이 죄석의 시트를 디자인한 것 같다. 

드디어 정시에 미끄러지듯이 기차는 출발한다. 속력이 점점 빨라지는 건 밖의 풍경을 보면 알 수 있다.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을 놓고 지도를 켜 놓는다. 나는 지도 위를 움직이는 작은 점을 보고 있기를 좋아한다. 위성으로 나의 전화기 위치가 지도를 따라 움직이면서 표시된다. 신경 쓰지 않아도 내가 허락하면 스마트폰은 나의 모든 동선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보여준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동선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기차가 빠르게 달릴 때 내 위치가 지도 위에 표시되는 걸 보는 것도 좋아한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지도의 위치를 본다. 조금 있으면 내가 원하던 바닷 길이 나올 것이다. 밖을 내다보니 바다가 보인다. 날씨가 흐려 태양 빛이 바다에 부서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검푸른 일렁임이 좋다. 바다를 보면서 한참을 간다. 지루해질 만하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이다. 이름으로 지도에서만 보던 또 하나의 도시가 현실에 다가왔다.


기차안에서 보이던 구름이 끼고 흐릿했던 날씨가 무지하게 덥고 습한 날씨로 바뀌어져 있다. 그새 구름이 바람에 밀려 날아갔는지 햇살이 아주 뜨겁다. 우주를 날아 새로운 도시에 데려다줄 것처럼 생겼던 기차는 많이 낡아 보이는 녹슨 육교가 있는 도시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녹슨 육교를 건너서 전차를 타기 위해서 걷는다. 전차가 온다. 전차도 낡았다. 전차에는 사람들이 많다. 길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다 전차 안에 있는 것 같다. 오래된 다리가 있는 낯선 거리를 찾아간다. 생각보다 쉽게 찾았다. 다리가 그렇게 멋지지 않지만 오래된 다리가 틀림없다. 작지만 연륜이 느껴지는 할머니의 모습 같은 다리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일본말이지만 그녀의 표정과 자신의 전화기를 내미는 것을 보고 금방 알아 들었다. 그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준다. 같은 삼성 폰인데 일본인의 폰은 찍을 때 소리가 나지 않아서 많이 눌렀다. 안찍히는 줄 알았는데 여러장 찍혔다. 활짝 웃으며 고마워하는 여자에게 폰을 건네줬다. 

다리를 뒤로 하고 이른 점심을 먹으러 짬뽕집으로 들어간다. 주방장과 나 그리고 카운터를 보는 직원이 다다. 나는 주방이 다 보이는 바의 자리에 앉아서 그 앞에서 짬뽕을 기다린다. 주방장이 빠르게 큰 웍을 흔들며 내 짬뽕을 만들었다. 내가 본 짬뽕 중에 가장 가지런하고 이쁜 짬뽕이 나왔다. 색깔도 모양도 좋았는데 양도 맛도 좋았다. 주방장과 카운터 직원은 내 옆에 서서 내가 먹는 것을 조금 지켜보다가 내가 잘 먹자 자리로 돌아갔다. 말이 필요 없었다. 왜 이도시가 짬뽕이 유명한지 알게 되는 맛이었다.

오후 내내 다리 아프게 도시를 돌아 다녔다. 항구와 공원을 걷고 오래된 거리도 걸었다. 기억에 남는건 무역을 하던 네덜란드인이 살았다는 저택의 풍경이다. 언덕위의 집에서 보이는 바다의 풍경은 곧 항해를 해서 그리운 고향을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한참을 돌아다니고 나니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이 있는 도시가 집처럼 그리워졌다. 불과 거기도 이틀 전에는 나에게 낯선 여행지였다. 

걷다가 지쳐서 이제 다시 기차를 타러 가려고 아픈 다리를 이끌고 또 전차를 탔다. 늦은 오후라 그런지 오전처럼 전차에 사람이 붐비지 않았다. 나는 중간쯤 한쪽에 앉았다. 모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언덕이 심한 좀 휑한 어느 정류장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탔다. 교복인지 체육복인지 아래위로 유니폼을 입고 커다란 가죽 배낭을 메고 한쪽에는 또 커다란 보온물병을 메고 있었다. 그리고 목에는 작은 지갑도 메고 있었다. 

조용한 전차 안에 그 아이만 손잡이를 잡고 내 앞쪽에 서 있다. 아이에게 나 대신 내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 줄 몰라서 그냥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아이의 가방이 아이 몸의 반쯤 되었다. 그리고 가방의 가죽은 정말 딱딱해 보였다. 내가 들어도 가볍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 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녀온 것이다. 그리고 옆에 멘 물통은 정말 컸는데 하루 종일 학교에서 물만 마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정거장을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갔다. 검은 가죽 가방과 커다란 물병을 멘 여자아이가 내렸다. 얼마 지나서 나도 내렸다. 다시 녹슨 철교를 걸어 올라 우주정거장으로 나를 데려다 줄 것 같이 생긴 기차를 타러 터벅터벅 걸었다. 그 아이가 집에 잘 돌아갔겠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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