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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03. 2023

느긋하면서 지루한 여름

소설 같은 현실

한차례 비가 내렸다. 봉은사 산책로를 걷는데 젖은 땅 위에 한쪽을 베어 물고 버린 사과가 있다. 누군가 떨어 뜨렸는지 주워가지도 않았다. 게다가 요즘 개미들은 배가 부른 지 나와서 과일을 먹지 않는다. 아니면 비가 와서 개미집에 홍수가 나서 복구가 한창이라 저장할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일꾼이 모자란 것 같다.


나의 여름은 방학을 시작으로 왔다. 어디에 가는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방학에는 항상 피서라는 이름으로 가족 여행을 갔다. 그 외 나머지의 일상은 길어진 낮만큼 느긋하면서도 지루했다. 아침을 먹고 해가 많이 뜨겁지 않을 때는 마당에 나가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개미들을 관찰했다. 우리 집 철문에서 현관 사이에는 돌계단이 있었다. 그 돌계단의 두 번째로 높은 계단의 끝쪽에 개미집이 있었는데 거기를 들락 거리는 개미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 흘러갔다. 개미들은 쉬지 않고 들락 거리면서 양식을 나르고 있었고 나는 그 까만 일개미들을 쳐다보는 게 좋았다. 개미들에게 마당은 우주 같은 세계이고 나는 그들에게 창조주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들이 가는 길 위에 물을 부어 홍수를 만들어 줄 수도 있고 그들을 위해 과자 덩어리 하나를 놔줄 수도 있었다. 그 두 가지 경우 모두 그들은 크게 동요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줄줄이 바위틈의 굴 속에서 들어가서 친구들을 데리고 나와서 일을 수습하기 바빴다. 


하지만 하루라는 시간은 참 느리게 흘렀다. 다들 어디로 나가서 그 긴 시간을 보내는 건지 혼자 있는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저녁에 티브이에서 만화가 할 시간까지 나는 긴 시간을 보냈다. 그건 어쩌면 내가 어렸기 때문에 긴 시간이고 지금은 절대 긴 시간이 아니다. 어쨌든 나의 그 지루함을 알아주듯이 엄마는 나를 외할머니 집에 데려다주었다. 나는 집을 떠나면 잠이 잘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외할머니와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았다. 할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내가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고 뭐든 나에게 줄 것을 찾느라 분주했다. 가끔은 나를 위해 다락에 올라가 이것저것 꺼내오곤 했다. 


지금은 다락이 아니라 그냥 벽장들이 있지만 할머니 방에는 정면의 벽에 문을 열면 2단으로 되어있는 다락이 있었다. 비교적 낮은 첫 번째 단에는 주로 할머니가 많이 쓰는 물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뒤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었는데 거기는 과자나 사탕도 있고 선물 받은 옷들도 있었다. 그 다락의 2단은 부엌의 위였다. 나는 가끔 거기 올라가 작은 창으로 마당을 내다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위험하다고 내가 거기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어둡지만 보물 창고 같은 다락이었다.  


나의 하루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지나갔다. 할머니가 부엌에 들어가도 마당의 장독대에 올라가도 나는 계속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할머니를 따라 교회도 가고 동네 쌀집도 가고 어디든 따라갔다. 누군가 계속 따라갈 사람이 있는 것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것이란 걸 그때 알았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할머니 집에서는 하루가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느라 피곤했다. 

내가 방에 누워서 잠이 들락 말락 하면 할머니는 내 앞에 앉아서 나에게 부채질을 해주셨다. 그 부채에서는 솔솔 기분 좋은 바람이 나왔다. 지금은 너무 흔한 선풍기나 에어컨과 달리 부드러운 손길 같은 바람이었다. 할머니는 부채질을 하다가 가끔씩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팔이나 다리를 한번 손으로 만져보고 몸이 더운지도 확인했다. 다시 부채질을 하고 내 몸을 쓰다듬고를 반복했다. 눈을 감고 언제쯤 또 할머니가 나를 만져주나를 기다리다가 보면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세상에 에어컨이 없는 여름을 지내다니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에어컨을 대신해서 부채질을 하고 더위를 견뎠다고 하는데 부채는 빚을 말하는 게 아니었나? 도사들이 가끔 가지고 다니며 쓰는 게 있던데 그 부채라면 당신의 할머니가 도사님이었나? 그만 이야기하자. 내 여름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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