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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19. 2023

갈매기의 꿈

도시스케치_시드니 맨리 비치

바닷가에 어둠이 내렸다.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는 산책 길옆으로 조명이 켜졌다. 야자수 나무와 가로등이 멀리 절벽이 보이는 해변가까지 주홍 점으로 이어졌다. 바다가 어두워지자 파도가 밀어내는 물방울의 뿌연 습기가 주변에 흐른다. 가로등은 그 습기를 뚫고 강렬하게 빛을 내지 못한다. 사방은 더 뿌옇게 습기가 가득 차고 가도릉은 시들거렸다. 이제 사람들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습기를 좋아하지 않는지 하나 둘 사라졌다. 사람들이 낯에는 모래사장을 가득 메웠고 산책길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이곳 광장의 탁자들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이제 모래사장 위에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만 휑하니 남아서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다. 산책길도 마찬가지고 광장도 마찬가지다. 가득 차고 넘치는 쓰레기통만 힘겹게 자리를 지킨다. 바람이 좀 더 거칠어졌다. 멀리서 길바닥 위로 알루미늄 캔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가로등 밑에 어디선가 나타난 연인들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진한 키스를 하고 있다. 


바다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난  큰길의 오른쪽에는 오늘의 역할을 다한 커다란 슈퍼와 은행이 환하게 빛을 발산하면서 푹 잠들어 있다. 처음에 언뜻 보면 환한 불빛 때문에 눈길이 가지만 문 앞에 가 보면 안다. 그들은 멀쩡한 허우대를 자랑하면서 고요히 잠들어 있다. 이곳에서는 오후 네시가 굉장히 늦은 시간이다. 그 시간 이후에는 더 썰렁하게 침묵하는 거리다. 오후 네시가 지나면 대부분 사람들은 집으로 가기 위해 은행과 슈퍼를 지나 반대 편의 버스나 페리 정류장으로 간다. 아니면 바다로 몰려든다. 그래서 나는 진작부터 이 길 쪽으로는 잘 가지 않았다. 여기는 쓰레기통도 꽉 차는 법이 없었다.  

은행과 슈퍼가 있는 건물의 반대편에는 시끄러운 음악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바가 있다. 외관은 우중충하지만 그 옆의 테라스는 낮처럼 환했다. 이 주변에서 밤에도 가장 아늑한 불빛이 있는 곳이다. 테라스 밑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밤을 보내면 테라스의 지붕이 비도 피하게 해 주고 조명 때문에 따끈하고 춥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시끄러운 술주정뱅이가 나와서 비틀거리면서 지나갈 때마다 잠이 확 달아나는 단점이 있었다. 


옛 기억이 났다. 그 테라스에서 꿈 많은 사람과 바다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밤을 새웠다. 그 사람은 계속 바에 들어가서 술을 사 왔고 바다 바람은 차지만 머리 위에 조명은 따끈했다. 그 사람은 말이 많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다 알 수는 없었다. 대부분 그렇듯이 그 사람도 꿈이 많았지만 겁도 많았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따끈한 조명을 쬐면서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나도 날개를 펴고 날아가기엔 너무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다 듣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깝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알코올 때문에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도 몇 방울 흘렸다.   

나는 어느새 깜빡 졸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눈을 떠보니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왔다. 너무나 추웠다. 머리 위에 있던 조명은 꺼지고 바도 잠잠했다. 그 많은 술주정뱅이들이 다 어딘가로 가버린 것이다.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하던 그 꿈 많은 사람도 나처럼 졸다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바다 냄새가 나는 해변 쪽으로 갔다. 뿌연 안개가 길 아래로 쫙 퍼져있었다. 벌써 태양은 반짝 떠 올라있었다. 파도도 힘차게 물보라를 일으켰고 그 위로 서퍼들이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다시 하루의 시작이었다. 나는 좀 더 따뜻한 태양 쪽으로 다가가서 밤새 맞은 바다의 이슬을 말리려고 힘을 다해 뛰어서 날았다. 뒤뚱거리면서 바닥을 뛰다가 날갯짓하며 도약을 하는 내 앞에 언제 왔는지 그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 그 사람을 본 적 없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오늘도 바의 테라스에는 전등불이 환하다 못해 눈이 부시게 밝혀져 있다. 나는 테라스 쪽으로 갔다. 테이블 아래쪽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얼마 전 태국에서 온 친구가 나왔다. 뜻밖이었다. 여기 테이블은 광장의 테이블과는 달라서 바닥에 떨어진 감자칩이나 과자 조각 같은 것은 없다. 차라리 어둡지만 바의 뒷문에 있는 쓰레기통 주변으로 가보는 게 먹을 것을 구하기는 수월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 친구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푸드덕거리면서 날아간다. 여기서 버티기에 날개를 편 뒷모습이 너무 빈약해 보였다. 그도 곧 광장에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감자칩을 얻어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걸 알게 될 것이다. 

아까 테이블 밑을 뒤지던 태국에서 온 친구가 다시 왔다. 쓰레기통 주변에서 먹을 걸 찾지 못한 눈치다. 며칠 동안 굶었는지 모르지만 힘이 없어 보였다. 테이블 위에서 따뜻한 조명빛을 쬐면서 쉬었다가 가라고 했다. 혹시 운이 좋으면 여기 나와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손님들이 팝콘을 던져 줄 수도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나올 때 놀라서 날갯짓하고 날기보다는 우습게 보여도 날갯짓 없이 빠르게 뛰어 잠시 피하는 게 낫다고 알려줬다. 뒤뚱거리며 다니는 걸 연습하는 게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좋다는 걸 야생에서 온 갈매기들은 모른다. 특히 먹을 걸 들고 있는 아이나 어른들에게 뛰어서 다가가면 먹이를 나눠주게 되어있다. 전등 빛 아래 따스한 온기가 나를 또 졸게 만든다. 초저녁인데도 바 안은 시끄럽고 멀리 바다의 파도소리가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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