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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02. 2023

낚시의자를 든 까만 손툽

사라지는 등장인물

나에게 길을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내가 길을 잘 알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걸기 편한 인상이어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영국에서도 미국과 스페인에서도 나에게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건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아마도 관광지에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고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한마디로 동네를 산책하는 사람으로 보여서 일 것이다.


오늘 오후에 동네 산책을 거의 다 마치고 건물의 후문으로 가기 위해 큰길에서 코너를 돌았을 때 옆에서 키 작은할아버지가 주춤거리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할아버지의 눈을 보고 나에게 뭔가를 물으려 다가오는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할아버지는 내 옆에 와서 길을 알려달라고 불렀다. 할아버지는 낚시의자 같은 접이식 의자를 길옆에 내려놓더니 나에게 한국 토지공사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나는 동네를 잘 돌아다니지만 그런 건물은 본 적이 없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가 순식간에 자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내가 지도를 다 받아서 여기를 가려고 하는데" 하면서 나에게 휴대폰을 보여줬다. 


그때였다. 내 눈에는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휴대폰의 지도보다 할아버지가 지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먼저 보였다. 뭉툭하고 굳은살이 많은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다섯 개의 손가락 끝의 손톱이 까맣게 변해있었다. 어릴 적 우리 할머니가 재봉틀을 하다가 바늘에 찔려서 손톱에 살짝 까만 피가 맺힌 걸 본 적이 있다. 그때 그 손보다 열 배는 더 거칠고 손톱은 모든 손톱이 완전히 다 까맸다. 내 할머니의 손도 손을 잡으면 전체적으로 손바닥이 두껍고 거칠었다. 이 할아버지의 손은 감히 그에 비할바가 못되게 몹시 거칠고 굳은살이 전체적으로 두껍게 배어있어 보였다. 굳은살은 꽤 오래 손에 붙어 있었는지 색이 누렇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이 신경 쓰여서 가까이에서 그 휴대폰을 보면서도 지도를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또한 그 할아버지가 내 옆에 다가와서 말하는데 할아버지들의 냄새인지 약간 촌스러운 냄새가 우리 사이 거리를 뚫고 났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가 여기 지하철에서 나와서 여기를 가려고 걸어왔는데 왜 그 건물이 안 보이냐"라고 당당하게 물었다. 처음에 다가올 때는 꽤 눈치를 보면서 소심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는데 말씀하시는 데는 자신감이 조금 있었다. 

내가 지도를 언뜻 보니 위로 두 블록 더 가야 하는 것 같아서 "위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더가야 하냐고 해서 다시 지도를 보니 아무래도 건물을 지나온 것 같아서 자세히 봤다. 우리 집을 기준으로 아래쪽인지 위쪽인지 자세히 보다가 내가 아는 휴대폰 대리점이 보여서 그때서야 나는 할아버지가 가려는 곳이 어딘지 알게 되었다. 

"여기서 저 아래로 한 블록 가시면 됩니다. 저 아래입니다." 내가 다시 말을 바꿔서 반대 방향으로 가라고 말했더니 할아버지는 내 말에 크게 수긍하는 것 같지는 않아 했다. 하지만 다시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는 돌아서 오면서 뭔가 더 정확히 아래로 가다가 왼쪽에 휴대전화 대리점 나오면 그 골목으로 내려가면 돼요 하고 말할걸 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자꾸만 할아버지의 손가락과 냄새가 신경 쓰여서 오래 곁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내 손을 보면 고생을 전혀 안 했을 손이라고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크게 집안일을 하지 않고 노동을 해서 돈을 번 적이 없다. 손등이나 손바닥에 주름이나 굳은살도 없고 마디가 굵지도 않다. 골프를 쳐서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 그리고 오른손 새끼손가락 밑의 손바닥에 살짝 굳은살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것도 겨울에는 없어진다. 게다가 나는 손을 씻는 것을 좋아해서 하루에 열두 번 이상 손을 씻는 편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향이 좋은 크림을 바른다. 물론 그건 건조한 계절에 주로 그렇게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비누로 손을 막 씻고 나오면서 손의 냄새를 슬쩍 맡아보는 순간이다. 나는 그 비누향이 내 손에서 은은히 나면서 손이 어떤 끈적함도 없이 개운한 느낌이 드는 걸 좋아한다. 


오늘 그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집에 와서 손을 씻고 나오면서 검은 손톱과 굳은살이 두껍게 베인 황토색의 손가락이 자꾸 생각났다. 그 할아버지의 손톱은 손톱이라고 말하기보다 뭔가 더 투박한 다른 부위 같아서 손툽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낯설었다. 굳은살이 전체적으로 베인 굵은 황톳빛 손가락과 검은 손톱이 내 머리에 맴돈다. 게다가 강남 한복판에서 낚시의자를 들고 어떤 일을 하러 다니는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단지 굳은살로 가늠해 보자면 그 정도 두께의 굳은살이 손바닥에 전체적으로 배어있으려면 굉장히 오랫동안 항상 손에 힘을 주는 일을 하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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