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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Oct 04. 2023

사치스러운 요리로 변신하셨군요

입맛의 성장_계란 프라이

티브이를 켜면 무지개색 색종이가 세로로 붙어 있는 듯한 화면이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나온다. 그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드디어 애국가가 나온다. 나는 한글도 시계 볼 줄도 몰랐다. 하지만 부엌에서 딸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쯤 티브이를 켜면 뉴스가 나오고 조금 더 참으면 만화가 나온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그때쯤 꼭 부엌 쪽에서 저녁밥을 먹으라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밥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 부엌 앞에 붙어 있는 식탁에서는 아쉽게도 거실의 티브이가 보이지 않았다. 


식탁에서는 어느 쪽에 앉아도 티브이는 보이지 않고 기껏 해야 보이는 것은 거실의 위쪽 소파가 놓인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밥 먹으라는 소리가 들리면 대답만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계속 질질 끌고 갈등했다. 그러다 때론 밥을 먹는 것을 포기하고 만화 보는 것을 선언하고는 했다. 왜냐면 만화영화는 그 시간을 놓치면 티브이에는 절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티브이 앞에서 만화 영화에 심취하고 있으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두 번에 한번 정도는 작은 상에 내 저녁밥을 따로 차려 갖고 오셨다. 


나무로 만든 장식이 옆에 있던 자주색의 상은 손님이 왔을 때 안방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용으로 쓰던 상인데 찻잔을 두 개 정도 올리면 꽉 찰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그 크기는 내 저녁 밥상으로는 딱 맞는 크기였다. "이 상에다 너만 따로 차려 줄 테니 저녁 먹어." 내가 저녁을 안 먹는 것을 싫어했던 어머니나 할머니는 상을 가져다 보여 주면서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설득당할 필요가 없었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티브이를 보는 그 즐거움을 마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계란 프라이 밥 해줘." 나는 마치 마지못해 먹는 것처럼 내 밥을 주문했다. 


하얀 쌀 밥 위에 흰자가 잘 익고 노른자는 그대로 탱탱하게 살아 있는 계란 프라이에 짭짤한 간장과 참기름이 뿌려져 있는 밥 한 그릇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티브이 시청용 저녁밥이었다. 만화를 보면서 그 밥 위로 숟가락을 넣어 노른자를 터뜨리고 간장과 함께 슥슥 비비면 입안에 침이 돌았다. 계란 노른자의 꾸덕함과 참기름의 부드러움이 잘 조화를 이루어 너무 뻑뻑하지도 질지도 않은 조화로운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는다. 계란 프라이의 익지 않은 노른자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와 간장과 참기름이 섞인 냄새가 난다. 그리고 뒤따르는 짭조름하면서 고소한 맛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만화가 더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계란 프라이는 여전히 내게 최고의 반찬이었다. 다른 많은 반찬이 있어도 시험 때는 계란프라이를 맛있게 해 줘야 기분이 좋았다. 그건 나의 이십 대에도 죽 이어졌다. 기숙사에서 살 때는 한식을 먹을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아파트에 나가 살고 있던 선배의 집에 우연히 가게 되었다. 그때 계란프라이와 깍두기만 있는 저녁밥을 먹었다. 평생 먹었던 저녁밥 중에 가장 맛있는 저녁밥이었다. 쌀밥과 깍두기와 먹는 계란 프라이가 사치였다면 베이컨과 소시지와 먹는 계란 요리는 아침의 일상이었다. 


기숙사의 식당에서도 아침에는 스크램블드 에그가 나오는 미국식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걸 먹느냐 아니면 도넛이나 시리얼을 먹느냐는 취향의 문제였다. 대부분 시리얼이나 도넛을 더 선호했는데 그건 대량으로 만든 스크램블드 에그가 맛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프렌치토스트는 그나마 금방 구워주어서 맛있었지만 미리 대량으로 해놓은 스크램블드 에그는 미지근하고 맛이 없었다. 


맛있는 계란요리는 기숙사에서 정말 먹을 수 없다고 포기했을 때 친구가 학교 바로 옆의 24시간 식당의 아침 메뉴에 대해서 알려줬다. 미국식 아침 메뉴는 계란 요리와 베이컨과 소시지 그리고 빵과 감자가 나오는데 잘 알아듣고 골라야 한다고 했다. "계란은 써니사이드업 그리고 감자는 해쉬브라운 빵은 화이트." 


학교 옆에 파란 지붕을 하고 24시간이라고 노란색으로 크게 써 놓은 광고판이 있는 팬케이크 식당이 그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식당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에게도 그 식당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공부를 하다가 밤늦게 친구들을 만났는데 다 같이 배고프니까 커피도 먹고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가게 된 곳이 그 파란 지붕의 식당이었다. 왠지 들어가면서부터 버터 냄새가 나고 정감이 가는 식당이었다. 


나는 미국식 아침을 시켰다. 미리 친구에게 들은 대로 내 음식의 선택을 말했다. 특히 내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계란 요리고 그 선택은 써니사이드업이었다. 금방 한 계란 요리는 다 맛있지만 나는 노른자가 톡톡 살아있는 계란 프라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역시 써니사이드업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두 개의 계란 프라이가 나오는 것도 즐거운데 같이 시킨 식빵을 계란 노른자에 찍어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 쌀밥에 비벼 먹는 계란프라이의 미국식 버전이었다. 계란프라이와 토스트를 먹고 커피를 마시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계란 프라이가 써니사이드업이 되어도 나에게 주는 기쁨은 변치 않았다.


요즘은 집에서 계란 프라이를 하기가 참 귀찮다. 그거 하느라 프라이팬을 꺼내기도 설거지하기도 귀찮다. 그래서 집에서는 대체로 계란을 삶아서 먹는다. 그런데 식당에 가서 계란프라이만 시킬 수도 없다. 이제 내게는 계란프라이가 귀하고 사치스러운 요리로 변신해 있다. 골프장에서 아침 메뉴로 먹던가 아니면 브런치 식당을 찾아가서 시켜 먹어야 먹을 수 있다. 가격도 착하지 않다. 아니면 가끔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운이 좋으면 아침 뷔페에 계란 프라이를 직접 해 먹을 수 있게 되어있는데 그때는 실컷 먹을 수 있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계란프라이는 말레이시아의 한 휴향 호텔에서 먹었다. 그곳 아침 뷔페에 햄버거를 직접 만들어주는 코너가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햄버거지 하고 지나다 보니 커다란 철판에 계란프라이를 하고 있었다. 햄버거에 금방 구운 패티와 계란프라이를 함께 넣어줬다. 나는 삼일 내내 거기서 햄버거를 먹었다. 패티가 다소 퍽퍽했는데 계란프라이의 노른자 때문에 촉촉하고 고소하고 맛이 좋았다.  만들기는 귀찮고 식당에서 사 먹기도 힘든 계란프라이를 생각하면 우리나라도 햄버거뿐 아니라 돈가스나 제육덮밥 같은 메뉴에 계란프라이의 콜라보가 많이 나왔으면 생각했다. 


계란프라이만큼 모든 음식에 잘 어울리는 순하고 고소한 음식은 없다. 나는 지금도 계란프라이라는 말을 들으면 시간을 거슬러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고 왠지 설레고 먹고 싶어 진다. 계란프라이는 둥글고 하얗고 노란 동심의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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