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의 성장_멸치
어릴 때는 멸치가 반찬으로 나와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멸치는 내게 생선이지만 비린내가 안 나서 크게 거부감은 없었다. 그리고 주로 작은 멸치를 간장에 볶아서 반찬으로 먹었다. 물엿으로 살짝 코팅되어서 딱딱하면서 달콤한 맛이 있었다. 내게 멸치는 특별하지 않은 그냥 흔한 반찬중 하나일 뿐이었다.
멸치는 집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생선이었다. 오후 한가한 시간에 부엌 식탁에 앉아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수북이 쌓인 멸치를 다듬었다. 저녁에 가스레인지 위에 국이나 찌재를 끓이거나 국수 국물을 만들 때면 솥 안에 다시마와 멸치가 동동 떠다니면서 끓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멸치는 거의 모든 국물 요리의 기본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어쩔 때는 김치찌개에도 멸치가 김치사이로 불쑥 튀어나와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대문 옆에 우리 집 강아지 밥그릇에는 국물을 낸 멸치가 항상 있었다.
흔하고 존재감 없는 멸치를 다시 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회사 근처에 유명한 국수전골 집이 있었다. 그 집의 국수 전골은 적당히 야채와 고기를 넣고 먹다가 국수를 넣어 먹는 방식이었다. 샤부샤부 같지만 국물이 사골 국물이었는데 맛이 좋았다. 식당내부는 사방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방으로 되어 있고 홀에는 식탁이 몇 개 없었다. 자리가 방으로 나눠져 있어서 조용한 게 장점이었다. 주로 외부에서 손님이 와서 같이 식사할 일이 생기면 가끔씩 예약을 하고 가는 곳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 집에서 점심 약속이 있었다. 12시가 되기 전에 사무실에 올라갔다가 다시 가기 뭐해서 조금 많이 일찍 그 식당에 갔다. 그 집 사장님이 가운데 식탁에 앉아서 멸치를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집에서 많이 보았던 익숙한 모습 그대로였다. 수북이 쌓인 멸치를 집어 머리와 내장을 제거하고 다른 쪽으로 옮겨 놓는 작업이었다. 그전까지는 몰랐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서 그 국숫집의 반찬을 보니 멸치가 있었다.
중간정도 크기의 멸치인데 머리와 내장이 깔끔하게 제거되고 고추장에 볶은 멸치였다. 단맛보다는 살짝 매운맛이 돌고 딱딱하지 않은 멸치볶음이었다. 머리와 내장이 제거되어서 반찬 모습도 정갈하고 맛도 멸치 내장의 쓴맛이 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그 국숫집에 갈 때마다 유심히 반찬을 보았다. 고추장 멸치볶음은 항상 나왔다. 잔멸치 볶음보다 살짝 매콤한 중멸치 고추장 볶음 맛이 좋았다.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멸치의 외모나 맛 또는 조리법에 대해서 인식하면서 먹기 시작한 것 같다.
간장과 물엿을 넣은 잔멸치 볶음은 기본이고 우리 집 식탁에는 내가 좋아하는 꽈리고추를 넣고 멸치를 간장에 조린 멸치조림도 있었다. 가끔 건강을 생각해서 호두나 아몬드를 넣은 견과류 멸치 볶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견과류 중에는 땅콩을 넣은 멸치볶음을 제일 좋아했다.
멸치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나서 얼마가 흘렀다. 골프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 일행 중에는 건어물 도매업을 하시는 분이 있었다. 대부분 골프 치면서 먹는 간식은 주로 과자나 초콜릿정도였다. 그런데 그분이 특이하게도 커다란 멸치를 가져와서 먹으라고 줬다. 내가 보기에 그 멸치는 국물 우려내는 멸치처럼 컸다. 그렇게 큰 멸치를 그냥 먹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의심쩍어서 망설이자 그분이 이 멸치는 그냥 머리도 내장도 다 같이 먹으면 맛있다고 하면서 직접 맛있게 드셨다.
속는 셈 치고 나도 그 커다란 멸치를 먹어봤다. 이제까지 내가 생각한 멸치 맛이 아니었다. 비린내도 안 나고 머리와 내장을 먹는데 쓴맛도 안 났다. 고소하면서도 적당히 씹히는 식감이 좋았다. 그 커다란 멸치의 기억은 오래갔다. 그 후 한동안 나는 골프장의 그늘집에서 맥주를 시키면 같이 딸려 나오는 바싹 마른 노란빛이 도는 중멸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괜히 비린 맛만 입안에 베개 만들고 식감도 종이같이 질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남해에 가서 멸치요리로 멸치회무침도 먹게 되었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멸치의 모습이 뭐랄까 고등어의 축소판 같아서 식감도 물컹하고 단 맛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나는 멸치회나 멸치 구이가 별로 맛이 없었다. 뭔가 감칠맛이란 게 없는 것 같고 살짝 뒷맛이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내 입맛에는 역시 멸치는 말린 멸치였다.
요즘은 식당 반찬에 멸치 볶음은 잘 나오지 않는다. 멸치와 연관된 것은 삼겹살을 먹으러 가면 주는 멜젓이 전부인 것 같다. 멜젓에 청양고추 조각을 넣고 불판에 올려서 살짝 끓여 삼겹살을 찍어먹는다. 맛은 비린내도 나고 짜기만 하다.
요 며칠 너무 덥다. 오늘은 내게 멸치가 참 맛있고 정갈한 반찬이라고 인식하게 해 준 중멸치 고추장 볶음이 생각난다. 더울 때는 생각나는 반찬이다. 아마도 중멸치를 머리와 내장을 빼고 다듬어서 고추장에 볶은고추장 멸치 볶음은 앞으로 어떤 식당에 가도 다시 보기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