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의 성장_냉면
저녁 해가 거의 넘어가서 어두워지고 있었다. 백화점에 갔다가 엄마 손을 잡고 오래된 골목들이 있는 거리에서 복잡한 식당에 들어갔다. 겉에서 보기보다 안은 넓고 환했다. 자리에 앉으니 주전자와 스탠 컵을 가져다줬다. 엄마는 육수라고 하면서 보리차와 비슷하게 생긴 물을 먹어보라고 주셨다. 따뜻하고 달고 고소한 고기국물이었다. 조금 있으니 투명하고 얇은 면발이 커다란 스탠 그릇에 담겨서 나왔다.
냉면의 면이 그렇게 쫄깃한 건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 후로 하얗고 얇은 면발과 감칠맛 있는 고기국물이 자꾸만 생각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그곳에서 부모님이 드시던 빨간 회냉면도 먹을 줄 알게 되었다. 나중에 하얗고 쫄깃한 얇은 면은 고구마전분으로 만든 함흥냉면이란 걸 알았다. 내 냉면의 시작이었다.
한국식당이 하나밖에 없는 동네에서 공부했던 나는 가끔씩 한인 타운이 있는 대도시에 나가면 집에 돌아오기 전에는 꼭 갈빗집에 들렀다. 갈비가 맛있기도 했지만 같이 나오는 된장찌개나 반찬도 맛있었다. 그리고 갈빗집은 밤늦게까지 했다. 그런데 갈비를 다 먹을 때쯤이면 식사 메뉴를 골라서 시키는 게 순서였다. 배가 불러도 나는 항상 물냉면을 먹었다. 얇은 배 조각이 올려져 있는 인공 소고기맛의 국물이 어릴 때 먹던 냉면 육수 국물을 연상시켜 줬다.
어느 여름방학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 경치 좋은 호텔의 한국 식당에서 갈비와 냉면을 먹게 되었다. 그때 먹었던 냉면은 처음 냉면을 먹었을 때와는 다른 면이었는데 그 냄새가 참 좋았다. 하얀 면이 아니었는데 금방 면을 뽑았는지 면은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고 특유의 메밀 냄새가 진했다. 냉면에서 면의 향에 처음으로 반했다. 국물은 내가 먹던 시원한 고깃국물이었다.
유명하고 오래된 식당들이 모여있는 동네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회사 앞에 쟁반을 파는 집이 있었다. 얇게 썲은 고기와 야채를 끓여주는 집이었다. 그 집에 들어서면 동치미를 담가 놓은 장독이 전시실 같이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냉면 국물에 넣어주기도 하고 쟁반을 먹을 때 동치미를 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맛있다고 하지만 내가 먹던 고기국물 냉면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면도 아무 냄새도 안나는 그냥 평범한 냉면이었다.
어느 정도 회사생활이 익숙해지자 회사생활의 낙으로 사람들과 점심이나 저녁에 맛집에 가는 일이 많았다. 나는 맛집에 대해서 별로 기대를 하고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그런 정보를 잘 알고 찾아 가는데 귀찮아하지 않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었다. 그렇게 따라다니다가 어느 날 마포에 있는 냉면집에 가게 되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어느 날 저녁 나는 굳이 이런 동네까지 와야 하나 생각하면서 살짝 언덕을 올라 동네의 허름한 냉면집에 갔다. 허름한 냉면집에서 밋밋한 고기국물의 냉면을 먹었다. 면에서 나는 향이 좋았다. 집에 돌아와서 그 밋밋한 고기국물이 생각나고 자꾸 떠올랐다.
수년 전쯤 여름에는 장충동에서 일하는 친구를 보러 갔다가 내가 처음 냉면을 먹게 된 오장동 냉면집에 들렀다. 여전히 사람은 많았다. 우리는 일층에 자리가 없어서 이층으로 올라갔는데 이층은 한산했다. 아마도 고객층이 대부분 어르신들이라 일층이 많이 붐비는 것 같았다. 나는 설탕을 쳐 먹지 않지만 그 냉면집의 시그니처처럼 흰 설탕통도 여전히 있었다. 그런데 왠지 냉면가게의 분위기에서 우리 부모님의 세대가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서 냉면은 굉장히 유명한 음식이 되어있었다. 나도 시간도 돈도 여유가 생겼다. 냉면이 생각나면 한 번씩 유명한 냉면집을 돌아다녀도 이상하게도 내가 먹었던 옛맛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기국물이 심심해서 좋아하던 냉면집 국물에서는 고기 비린내가 나고 면에서 향도 많이 줄었다.
그나마 옛 기억의 냉면 비슷한 것을 먹은 것은 어느 날 홍천을 갔다 오다가 100프로 메밀면이라고 쓰여있는 막국수집에 들어가서였다. 사장님이 주문을 받으면서 100프로 메밀로 면을 뽑으면 찰기가 없어서 미리 뽑아 놓을 수 없다고 좀 기다려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그런 걸 몰랐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간 집인데 정말 면의 향과 맛이 좋았다.
생각해 보니 언제부턴가 나는 라면에서 밀가루 냄새가 나서 맛보기로 남들이 먹을 때 먹는 정도지 돈 주고 사 먹지 않는다. 더구나 짜장면은 그냥 어릴 때부터 먹지 않아서 그런지 맛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면요리 중에는 그래도 물냉면을 먹는다. 나에게 냉면은 함흥냉면이든 평양냉면이든 고기국물 맛과 면의 향이나 질감이 중요한데 값은 비싼데 만족도가 낮다. 요즘은 냉면집을 안 간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고깃집에 가서 식사는 안 하고 고기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