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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Oct 27. 2023

수제족발집을 지나쳤다

입맛의 성장_딸기잼

일본 출장 중에 주말을 맞아 롯폰기에서 시간을 때우면서 쇼핑센터를 돌아다녔다. 무심코 지나가다가 유리칸마다 명품백보다 더 깔끔하고 화려하게 과일을 잘 진열해 놓은 가게를 봤다. 거기에 상처 하나 없는 하얗고 커다란 딸기가 잘 포장되어 있었는데 가격이 몹시 비쌌다. 


그 가격이면 몇 박스를 사고도 남을 가격이었다. 내가 잘 못 본 걸까 생각했는데 가게의 화려함과 전시된 상태를 보면 잘못 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저 딸기는 어떤 맛이 길래 저렇게 가격이 비쌀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흠집하나 없는 밝고 윤이나는 매끈한 딸기는 하얀 초콜릿을 입혀 놓은 것 같이 생겼다. 


신맛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딸기는 작고 흠집이 나서 약간 물러지려고 할 때가 가장 맛있는 과일이었다. 어릴 때 내가 잘 먹던 딸기는 대체로 작고 새콤했다. 여름이 다가오면 우리 집 부엌 뒤쪽의 작은 마당에서는 살짝 시큼한 향을 내는 딸기가 큰 솥에 끓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걸 타지 않게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저으면서 설탕을 넣어 딸기잼을 만들었다. 딸기잼의 색깔은 붉은빛보다는 약간 검은빛에 가까웠는데 하얀 설탕을 넣으면 시큼한 냄새대신 달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그걸 먹고 싶어서 졸랐고 그러면 어머니는 뜨거운 딸기잼을 조금 덜어주셨다. 뜨거운 딸기잼 맛은 차가울 때 맛보다 못했다. 차가운 딸기잼은 달고 뜨거운 딸기잼은 셨다. 집에서 아침에 토스트를 먹을 때면 딸기잼을 발라서 먹었다. 집에서 만든 딸기 잼은 딸기의 섬유질이 덜 녹아내려서 새콤한 질감이 있는 잼이라 맛이 더 좋았다. 시간이 흘러서 나는 수제 딸기잼과 이별했다. 더 이상 어머니는 집에서는 딸기잼을 만들지 않았다. 가끔씩 딸기잼이나 땅콩버터잼을 사다 놓았다.    


그러던 중에 고등학교에 가서 딸기잼을 사 먹을 기회가 생겼다. 미국에서 들어온 체인 치킨집에서 비스킷이라는 빵을 팔았다. 겉은 딱딱하면서도 속은 부드럽고 기름의 냄새가 나는 과자와 빵의 중간쯤 되는 빵이었다. 비스킷을 사면 딸기잼을 줬다. 네모난 딸기잼은 양쪽으로 구부려서 짜면 가운데서 쨈이 나왔다. 비스킷에 딸기잼을 뿌려서 먹으면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하나의 비스킷에 지우개만 한 네모난 딸기잼 한 개와 버터를 줬는데 넉넉히 비스킷에 다 바르기에는 적은 양이었지만 모자라서 더 맛이 좋았다. 


고등학교 때 자주 사 먹던 치킨집 비스킷과 이별하고 딸기잼에 대해서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에 다닐 때 슈퍼에서 딸기잼과 같은 모양이지만 씨가 더 많고 진한 색깔의 라즈베리쨈을 보았다. 딸기잼보다 더 맛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라즈베리쨈을 샀는데 신맛이 딸기잼보다 강했다. 나는 신맛을 좋아하지 않는데 설탕 맛보다 신맛이 나는 쨈이었다. 하지만 딸기잼의 야생 버전인 라즈베리쨈은 씨가 씹히는 맛이 좋았다. 그리고 신맛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버터를 많이 바르고 라즈베리쨈을 발라 먹으면 버터의 고소함으로 신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한국에 와서는 회사를 다니느라고 아침을 잘 먹지 않아서 쨈을 거의 먹지 않았다. 아주 가끔 호텔에서 조식을 먹을 때도 딸기잼보다는 버터와 치즈를 먹었다. 어린이의 입맛이 아닌 어른의 입맛이 갖춰진 것 때문은 아니었다. 쨈이 맛이 없어서였다. 물렁거리는 딸기의 건더기가 씹히는 딸기잼이 아니라 너무나 부드러운 젤리 같은 딸기잼이라서 손이 가지 않다가 영 이별하고 만 것이다. 물론 포도잼이나 살구쨈들도 있지만 그런 쨈들은 더 젤리 같아서 먹지 않았다.


얼마 전 지나가다가 수제족발이라고 간판을 단 족발 집을 보았다. "손으로 만들지 그럼 발로 만드는 족발도 있어?" 옆에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수제족발이라고 하는 건 낯설었다. 아마도 대량으로 공장에서 기계의 힘을 빌려서 만들지 않고 직접 만든다는 뜻일 거라 생각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어머니 손에 크고 기다란 나무 주걱이 쥐어져 있고 큰 솥에 딸기가 펄펄 끓던 장면이 잠시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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