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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진 Mar 07. 2021

너의 정원에도 이제 다시 봄





이것은 부고에 관한 기록처럼 시작하나, 결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문장이기에는 남겨진 이의 그림자가 너무 길다. 겨울 초입, 그 집 앞에는 앰뷸런스가 조용히 왔다. 사이렌을 울리지 않아 그다지 주의를 끌지 않았기에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는 주차를 하던 나를 발견하고, 예전처럼 내게 반갑게 다가왔다. 나는 안부를 묻는 보통의 단어들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 내가 그들에게 제일 듣고 싶지 않던 말을 결국 들어버렸다. 


“Alles gut?” 

  “Nein, nein. Ich bin nicht gut. Meine Frau ist am letzten Wochenende gestorben.” [i]


이내, 일주일 전 창 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던 그녀를 기억해냈다. 그들의 집과 나의 부엌 창의 가까운 거리는 그 날 따라 햇살에 부셔 천사의 날개처럼 투명했다. 유난히 깔끔하게 뒤로 넘긴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더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는 일상의 나날이 일주일이 지난 오늘, 그녀의 남편, 볼프강에게서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주일 전 그녀는, 그러니까 내가 엘리자베스를 마지막으로 본 그 날이, 그녀가 사망하기 바로 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전히 매일처럼 자신의 어깨를 할 수 있는 한, 앞으로 더 밀어 창 가까이 코를 댄 채로 창 밖의 풍경을 더욱 담으려고 했다. 더욱 부드럽고 천진난만하게. 그때의 모습이 너무 거울처럼 선명하다. 

위로에 대한 언어는 동일하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 너와 내가 느끼는 지금의 슬픔을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침묵을 무겁고 귀하게 지켜내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온갖 슬픔이 묻은 위로와 공감의 마음을 어떻게 진심 그대로 가 닿게 할 수 있을까? 방금 전, 운전을 하며 끼고 온 동네 교회의 첨탑 꼭대기에는 “코로나 위기를 잘 이겨내세요. 하느님이 언제나 당신 곁에 있어요.”라는 문장과 함께 무지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Got bleibt immer mit Ihnen.” [ii]


타국의 언어로 나의 진심을 제대로 전할 줄 몰라 우왕좌왕하다 우연히 아까 본 문장을 입 밖에 꺼냈다.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 같이 보이던 그들의 한편이 너무나 섧다. 햇살 좋은 날이면 골목에서 아주 천천히 발을 옮기고, 남편은 아내의 팔을 잡은 손을 겹쳐 올려 꼭 잡았다. 그렇게 걷던 걸음 뒤로 맺히던 그림자는 햇살보다 더 포근히 그들을 세계 속으로 밀어주었다. 창 밖으로 나의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과, 우리가 미소로 화답하던 순간에는 여전히 잘 살아 내줘서 고맙다는 다행인 마음이 가득했다. 같은 건물에 코로나 환자가 생겨 구급차가 요란스럽게 와 있었을 때도 들것에 실린 아픈 이가 <너의 정원에서 4번지>의 볼프강과 엘리자베스가 아니길 간절히 빌었었다. 그리고 창가에서 그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곁에 있음에 감사하다고 홀로 조용히 속삭였다. 


생각건대, 내가 <너의 정원에서>로 이사 왔던 그 날, 창문 끝에 콧등을 문지르며 우리를 바라보던 엘리자베스에게 우리는 꽤나 신기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외국인인 우리들이 그들에게 맨 처음 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 커다란 미소로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도 우리에게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미소 아래에는 말없이 건네는 인사가 흘러내렸다. <너의 정원에서>를 사이에 두고 나는 나의 부엌 창문 앞에서, 노부부는 자신들의 부엌 창 앞에서. 우리는 자기 세상의 전부인 창 밖 풍경에 서로가 있었다는 것을 다행으로 삼았다. 나는 내 창가 앞에 서서 그들과 마주하는 순간마다 할 수 있는 한 커다란 원을 그리며 팔을 흔들었다. 진심을 다한 인사를 건네는 것이 그들의 안부를 위한 최선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손과 발이 되어 준 그녀보다 여섯 살 젊은 남편, 86세 볼프강 할아버지는 감격적으로 헌신적이었다. 그들을 찾아오는 친인척도 없었다. 외출은 식료품 구입이나, 주말에 교회만 가는 일뿐이었다. 아들이 바로 옆 골목에 산다고 했지만 몇 년 동안, 얼굴 하나 내밀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그들의 사적인 서사를 상상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을 짚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우리가 있는 것 만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가끔 케이크가 맛있게 구워지면 노부부에게 가져다주어 나눠 먹었고, 신선한 제철과일도 챙겨 초인종을 눌렀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챙겼다. 우리에게 정말로 고마워했다.

이제 나는, 내게 아내의 부고를 알리고 무겁게 뒤돌아 걸어 들어가는 볼프강의 그림자를 따라간다. 그것은 삶이 깊이 파이고 묻힌 어둠이다. 깊은 어둠은 가끔 낮에도 희게 빛난다. 오늘 같이 교회 첨탑에 위로의 말이 걸린 날, 누군가의 진한 삶이 무겁게 묻힌 그림자가 따라 걸어준다. 간밤에 여기 <너의 정원에서>의 길 위에 흰 눈이 온통 한 없이 내렸다. 창 밖 새벽이 한 낮처럼 밝다. 창 밖으로 볼프강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 새벽에 어디로 가는 걸까 아무렴, 엘리자베스가 묻힌 동네 공동묘지에 다녀오겠지. 그녀의 몸 위에 앉은 눈들을 치우고 돌아오겠지. 


부고 소식을 듣고, 서둘러 슈퍼마켓에 들러 양초와 과일과 견과류들을 사서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엘리자베스의 부고 소식과 영면식이 열리는 추모의 날짜를 알리는 카드를 받았다. 


“Das ist Leben” [[iii]


 이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나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그것이 삶인 것 같으니까. 코로나 때문에 누구를 위로하며 안을 수도, 손을 잡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밤이 오면 그의 집이 더 훤히 보인다. 아직 커튼을 치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오직 램프 하나만 켜 놓은 볼프강이 작은 식탁 앞에 앉아 있다. 아주 오랫동안 고개를 떨구고 무거운 몸을 늙은 어깨로 지탱하며 앉아있는 그의 앞에 언젠가는 엘리자베스가 앉아 있기를. 그리고, 한 번은 꼭 그녀가 나의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려주기를. 이것은 이미 지난 그리운 이를 지키는 방식으로 남겨진 이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봄이 오면 볼프강의 그림자가 조금 짧아질는지 모르겠다. 겨울이 길게 패인 제 그림자를 아직도 쫓는 중에, 지금을 어렵게 버티는 듯한 그를 조금 따뜻한 곳으로 밀어줄 봄의 그림자를 바란다. 


   


이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나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그것이 삶인 것 같으니까.


 


[i]

모든 것이 다 괜찮나요?

아니야. 잘 지내지 못해, 아내가 지난주에 죽었습니다. 



[ii]

하느님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iii]

이것이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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