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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진 Jul 10. 2021

밤 아홉 시에 내가 마주한 것들  




누텔라 한 병과 오이 서 너개, 요구르트 두 통을 산 남자는 눈이 얼굴 속으로 쑥 들어가 있었다. 야광 선이 흐릿해진 안전 조끼 위에는 오래전 묻은 흙도 다 털어내지 못해 짓이겨진 얼룩이 가득하다. 그의 걸음은 하루를 절며 걸었지만 끝내 이겨 낸 걸음이다. 이곳 사람들이 입는 회색 카고 바지 타입으로 된 통이 넓은 작업복의 큰 두 호주머니는 무거운 연장이 들어있는지 축 늘어져 있다. 햇빛에 탄 민머리는 나이를 가늠하기도 힘들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커다란 눈망울에 그의 오늘이 가득 들어있다. 나는 그를 모르지만 이내 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곧바로 눈길을 피했다. 왜 눈을 마주치지 못했을까.


식사 시간 대에 마트를 가면 이런 사내를 자주 봤다. 식사 시간 대에 마트에 가면 과자 한 봉지와 콜라 한 병, 혹은 빵과 커피, 가끔은 포장된 샐러드를 사는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 한입 거리 정도의 간편식을 산다. 나는 카트 가득 식료품을 넘치게 담고 줄을 서는데 그 순간 얼마나 머쓱해지는지. 내 앞에 먼저 가서 계산하라고 말한다. 그의 시간을 뺏는 것도 싫고, 그보다 많이 소비하는 것이 조금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아무 연고 없는 수치심 같은 마음이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 보통은 저녁을 먹고 잘 준비를 하는 시간, 밤 아홉 시에 마트를 갔다. 문이 닫히기 십 여 분이 남았다. 계산대 앞 쪽에서 계산 중인 여자는 딱 봐도 퇴근 후 들린 모양이다. 담배 한 갑과 아이들이 마실법한 작은 팩에 들어있는 사과주스, 인스턴트커피, 냉동 치킨 너겟 정도를 사면서 핸즈프리로 이곳 언어가 아닌 다른 말로 전화 중이다. 집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을까? 그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약 없다면 그녀가 자신의 안식처에 도착했을 때 누가 그녀를 반길까.


이 나라에서 오늘 같은 밤 아홉 시에 내가 본 것은 나와 같은 이방인이었다. 인도인 가족들, 터키 말을 하는 아이, 아빠 없이 병을 팔러 온 형과 동생, 공사장에서 일하는 남자. 형광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한껏 멋을 부린 검은 수염, 검은 머리, 새까만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 휙휙 운전을 하며 그들을 지나 집으로 오는 길, 자동차 속에서 아무도 시키지 않는 사과를 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인사를 했다. 낮에는 사람들의 관계가 친밀해 보인다. 사회에 어느 정도 작은 소속감이 있기 때문이다. 공사장에 근무하고, 학교를 다니고, 음식점에서 일을 하고, 유치원을 가고. 우리는 무거운 '우리'라는 단어 속에 숨는다. 하지만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밤의 순간에는 거리를 두게 된다. 우리의 민낯을 보듯, 너무 고단한 하루의 위로마저 감히 해줄 수 없을 단순한 인사도 못 건네는 우리의 그림자를 멀리서 어루만진다.


오늘은 스무 살도 안된 잘생긴 청년이 마트 입구에서 모자를 뒤집어 놓고 손을 떨며 돈을 달라고 했다. 7월인데도 흐릿한 우기 때문에 패딩을 입었던  나의 여섯  아들의 눈에는 더워 보였는지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불현듯 불행과 다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단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쓸쓸하고 고단한 하루를 사는 사람은 그렇다고 불행한 것은 아닌데. 그와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삶을 응원한다는  역시 멋대로 아닌가. 내가 시리아에서 목숨을 걸고 독일로  라라를 만나고  아이와 친구가   배운 이방인의 공통된 신념. 그것은 삶에 대한 다짐이었다. 오늘 아홉 , 부유해 보이는 사람은   명도 없었다. 마트 캐셔는 마지막까지 주말  보내라는 친절한 인사를 했다. 나는 최대한 밝게 인사했다.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라고. 당신도 주말  보내라고. 야광 조끼를 입은 그가 카트에 기대듯 말 듯 꼿꼿이  있다. 그의 하루는 고단 했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충분히 자신의 것이 있다. 누텔라 오이도, 요구르트가 있다. 먹먹한 다짐이  그림자를 차는  아홉 시였다. 아직 일몰이 오지 않은 밖은 충분히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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