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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Nov 16. 2023

떠도는 아이

애자가 내내 앉아 있던 바위 위에서 벌떡 일어난다. 박꽃 같은 작은 얼굴에 웃음을 담고 곧이어 손을 힘차게 흔들어 자신이 여기에서 있음을 알린다. 먼 친척 소개로 경수를 만났을 때부터 애자는 단박에 끌렸다.

훤칠한 경수의 모습이 애자는 좋았다. 말수가 적기는 했지만 애자를 챙기고 위해주는 모습이 마음에 남았다.


배에서 내리는 경수의 풍모가 바닷바람처럼 시원하고 미끈하다. 애자도 배의 출렁임에 함께 흔들린다. 그와 함께라면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경수의 집안에 경수 말고 여덟이나 되는 형제들만 있다는 것도, 호랑이같이 강하고 인정머리 없는 시어머니가 애자에게 썩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도 애초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빠들만 위로 셋, 윗대부터 여식이 귀한 집안에서 애자는 어렵게 얻은 늦둥이딸이었다. 맹목적인 아버지 사랑과 귀애함을 독차지하며 살았다.

아버지의 밥상머리에서 애자의 자리는 언제나 아버지 무릎 위였다. 그래선지 가난한 삶의 고단함이나 시집살이의 험악함을 실감할 수 없었다. 경수와의 결혼이 곧 시련이라는 걸 애자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총명하고 똑똑한 애자는 세 오빠들과 달리 부모님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 자신에게 경수 같은 멋진 청년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왜소한 애자에게 대나무처럼 든든한 데다 허우대도 멀끔한 경수가 강하게 끌린 건 당연했다.

애자에게 딸이 태어난 건 그다음 해였다. 출산 자체가 애자에겐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위험한 일이었지만 아기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이는 애자의 첫 딸이 되었다.


아픈 애자에게 육아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경수의 대책 없음이다. 핏덩이 갓난아이와 함께 지내는 세 식구의 단칸방에 경수의 넷째 형님이 와서 몇 달 동안 지냈다. 어려움에 처한 회사식구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경수. 형님의 식솔들까지 챙기다 보니 이젠 생활비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일이 이어졌다.

애자는 살 수 없었다. 아니, 살고 싶지 않았다. 배가 고팠고 배고파 우는 아기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젖을 물려도 나오지 않고 빈 젖만 빠는 딸이 안타까웠다. 해파리처럼 흐물거리는 경수의 착한 심성이 세 식구의 생계에 이토록 걸림이 될 줄 몰랐다. 배도 고프고 미래는 안 보이고. 애자는 이 난관을 견딜 수 있을까.


경수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지 일주일이 되었다.

빈 속을 달래러 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나온 어느 날, 잠투정을 하는 아기를 재우러 밖으로 나온 애자가 무엇에 홀린 듯 걷기 시작한다. 그녀의 등뒤로 딸아이의 칭얼거림이 들리고 아기를 업은 애자의 힘없는 발걸음이 마을 앞 느티나무에 이른다.

물끄러미 나무 아래를 바라보고 선 애자.

어느덧 어둑해지는 하늘.

무엇을 결심한 듯 애자가 나무 아래에 포대기를 풀어놓는다. 잠든 아기를 확인하고 가만히 포대기의 귀퉁이를 여미고 일어서서 돌아선다.

애자가 소리 없이 다섯 발자국이나 떼었을까?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돌아본다. 애자의 눈이 커다래진다.

방금 잠이 깬 아기가 엉금엉금 기어 나오며,

음... 마, 음... 마, 하는 게 아닌가!


다리에 힘이 풀린 애자는 고꾸라지듯 넘어지듯 아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운다. 죄 없는 아기에게 미안해서 운다. 아기를 두고 떠나려 했던 자기 마음을 용서할 수 없어서 운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경수가 원망스러워 운다.


밑으로 두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이는 세월이라는 시간과 손잡고 함께 성장해 갔다.

애자는 병을 얻어 투병 중이다. 사랑하고 미워했던 경수는 8년 전 세상을 떠났다. 경수를 보내고 애자는 다른 차원의 생을 또 맞아들인다.

경수와 함께 보냈던 세월이 한낮의 꿈만 같은.

경수가 없는 세상.

모든 것이 있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세상.

애자는 그 이전의 애자가 아니다.

이젠 아들에게 남은 삶을 의탁한 생.

텅 빈 애자의 품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는 자기가 버려질뻔한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무덤덤하게 듣는다.

그리고 일상을 산다. K장녀의 전형적인 책임감과 올곧음으로 독립적인 인간이 된 아이.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나 또한 누군가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을 수는 없으리란 사실을 알아차린 아이. 

비교적 냉정한 성품의 아이로 자란다. 아기였던 시절에 생긴 아이의 마음속 구멍이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는 건 엄마도 아이도 몰랐다.


아이가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때, 홀로 남은 엄마가 병환으로 떠났다. 아이는 이제 오롯이 자신과 남편이 꾸린 가족 만으로 남는다. 아이를 있게 한 안온하고 따뜻한 포대기를 잃어버리고.


아이는 가족 안에서 행복했지만, 지나버린 이야기 속에서 바닥에 닿지 않는 발로 살았다.

부모님은 아이를 믿어주었자존감의 원천이었지만, 아이의 마음에 생긴 구멍을 메꾸지 못했다. 누구도 믿지 않았고 온전히 마음을 내주지도 않았다.

이런 모양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 중년이 훨씬 넘은 때였다. 그 생면부지의 생경함. 아버지와 엄마를  잃남겨진 삶.

아기 때의 상처와 버려짐이 어디든 정착하고 뿌리내릴 수 없는 떠도는 아이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그때 잠든 아기가 깨지 않았더라면, 포대기에서 기어 나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겠지.

엄마의 품으로 돌아갔기에, 버려지지 않았기에 나는 지금의 나에게로 도착할 수 있었다.

애자인 엄마의 고단함과 아빠 경수의 고독함이젠 조금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들이 스스로를 갈아 넣어 나를 키웠기에 나는 지금 생에게 손을 내밀어 고개를 끄덕거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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