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마다 애덤스미스와 최진석을 파헤쳐 삶을 공부하는 중이다.
지난 일 년간 인문학을 읽으면서 삶이 습자지처럼 얇아진 기분이다.
처음엔 너무 어려웠고 지금도 쉽지는 않지만,
삶이 전보다 단순하고 투명해진 것은 분명하다.
내가 만난 인문학은 진창 같은 감정에서 빠져나오도록 돕는 죽비 같다.
거듭 감정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했고 그런 나를 관찰하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편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 자신의 비참한 상황이 우리 자신을 극도로 괴롭히고 있다면, 우리는 이웃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를 갖지 못한다. 모든 미개인들은 그들의 결핍과 필요가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결핍과 필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것이다.
p. 387
그러면서 북아메리카의 미개인들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완전히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모든 일에 심드렁했던 나의 과거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결코 띄지 않았던 나의 비참한 상황이 나를 극도로 괴롭히고 있었다.
분명 그때 나는 미개인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하나로 꿸 줄 알아야 하는데 아직은 멀다.
일반적으로, 어떤 국민들 사이에 나타나는 행위방식은 통상 전체적으로는 그 국민이 처한 환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은 야만인들의 환경에 가장 적합한 성격이며, 예민한 감수성은 매우 문명한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환경에 가장 적합하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의 도덕감정이 관습이나 유행에 의해 매우 크게 왜곡되어 있다고 불평할 수 없다.
p. 395
수년간 고된 노동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밭에서 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종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아침부터 캄캄한 밤까지 이어지는 공장일이 쉬울 수가 없다.
우리가 가진 사고와 일상의 기준은 각자가 세운 기준이라기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내가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도덕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가진 인식과 오랜 시간 구축된 편견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내가 세운 기준이라고 해봐야 관습이나 유행의 테두리 안에서 세워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옳은 쪽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관습으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깊은 사유 안에 고정된 관찰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책에서 읽은 것으로 삶을 해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유가 깊지 못하면 글을 더 파내려 갈 수가 없다.
나는 얕은 내 생각 위에서 놀지만 이젠 좀더 깊은 곳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다.